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베르디 / 이탈리아 작곡가. 레론코레 출생 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1813∼1901]
이탈리아 작곡가. 파르마현 부세토 부근 레론코레 출생.
교회에서 음악에 관한 기초지식을 습득하던 중 재능을 발견한 부세토음악원장 프로베지 등 경제적 지원자의 도움으로 연구를 계속했다. 1832년 밀라노음악원 입학에 실패한 뒤 스칼라극장의 음악가에게 개인교습을 받았으며 36년 부세토의 산 바르톨로메오대성당 악장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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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 밀라노에서 최초의 오페라 [오베르토]을 작곡, 39년 스칼라극장에서 초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이듬해 초연된 [하루 만의 임금님(가짜 스타니슬라오)]이 실패로 끝나 실의에 빠졌으나 스칼라극장 지배인 메레리의 후원으로 [나부코]을 작곡하였다. 42년 스칼라극장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성공을 거두었는데, 특히 유대인들이 노래한 <가라, 생각이여, 황금의 날개를 타고>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압정 아래 있던 이탈리아의 조국통일운동 속에서 제 2 의 국가(國歌)가 되어 널리 불려졌다. [나부코]의 성공으로 그는 오페라작곡가로서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애국심의 상징이 되었다.
44년 베네치아 페니체극장의 의뢰로 작곡한 [에르나니]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오페라극장을 돌며 신작을 발표했다. 47년 발표한 [맥베스]은 증오와 몽상이라는 인간감정의 적극적 표현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 결과 이탈리아 오페라는 보다 극적인 통일성, 심리적 표현을 다루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작품 가운데 51∼53년에 걸쳐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 등 성격이 각기 다른 걸작을 발표했다.
[시칠리아섬의 만종(1855)]은 프랑스의 그랜드오페라 양식에 따른 작품으로 파리에서 초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59년 발표된 [가면무도회]는 나폴리의 산카를로극장의 부탁으로 만든 것이지만 나폴리왕국이 오페라화를 인정하지 않아 이야기무대와 인물 이름을 변경해서 발표했다. 이 작품은 사르데냐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오스트리아에 도전하려는 시대정세 속에서 [나부코]과 마찬가지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다. 61년 국회의 하원의원으로 선임되는 등 명성이 높아진 그에게 여러 나라에서 작곡 의뢰가 들어왔다.
[운명의 힘]은 러시아의 페테르스부르크황실오페라극장의, [돈 카를로스]는 파리오페라극장의 의뢰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71년 초연된 [아이다]는 수에즈운하 개통을 축하하는 카이로의 오페라극장을 위한 작품이다. 16년 동안 오페라 작곡에서 손을 뗀 뒤 E.G.G. 보이토의 도움을 받아 옛 작품의 개정작업을 하고 수년에 걸쳐 여러 가지 수정을 더한 [오텔로]을 발표했다.
이 작품에서는 노래와 관현악이 어우러진 표현이 한층 추구되고, 노래마다의 구분이나 아리아·레시터티브의 구분 등은 사용하지 않았다. 희극적 성격이 강한 [팔스타프]를 마지막으로 극장을 위한 작곡활동을 중단하고, 이후에는 [성가 4편] 등의종교적 작품을 작곡했다. 그는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 속에서 19세기 전반의 벨 칸토(bel canto) 오페라시대의 유일한 개성적 작곡가로 활동했다. 그는 구성상의 문제와 연기에 유의하여 이탈리아 오페라작곡가로서 항상 유려한 선율성을 주장했으며, 당시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국 독립을 부르짖던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1813∼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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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페 베르디는 1813년 10월 10일에 이탈리아의 북부의 한 촌 론콜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여관과 식료품점을 겸하고 있었는데 남자 아이가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좋아했다. 생가는 본인이 후년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었던 것과 같은 가난한 소작농의 가계는 아니고, 대대로 내려오는 소지주로서 여인숙을 경영하고 상업에도 종사했었던 모양이다. 당시 이탈리아는 나폴레옹의 점령하에 있었으나 1814년 1월 나폴레옹을 쫓아 남하한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의 침입을 받아, 레 론콜레는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유명한 라데츠키 장군의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에 의하여 유린되었다.
어린 베르디는 어머니에게 안겨, 마을 중앙에 있는 성 미카엘 교회의 종루 밀실로 피해서 재난을 면했다. 아버지의 가게를 찾아오는 떠돌이 음악사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베르디를 음악의 길로 나아가도록 말했다고 한다. 베르디는 7세때 교회 미사의 시동이 되어 파이프 오르간의 풀무질을 하고 있었다. 8세의 생일에 선물로 받은 오르간은 현재도 스칼라좌 속에 있는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그 후 성 미카엘 교회의 오르간 주자로부터 음악의 지도를 받아, 악보 읽는 법을 배웠다. 10세에 노령의 오르간 주자의 뒤를 이어 교회의 오르간 주자가 되었다.
1823년부터 가까운곳에 있는 부세토 중학교에 다녔다. 8년간의 부세토 중학교에 다니는 동안, 오르간 주자 프로베지가 음악학교의 강의를 청강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줬다. 베르디는 여기서 음악의 기초를 익혔으며 1831년 오르간 주자 바레치는 베르디를 자택에 입주케 하고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의 딸 마르케리타와 두사람이 연탄을 행하고 있는 동안에 미모로 유명한 마르게리타와의 사랑이 싹텄다.
1836년에는 부세토의 음악 감독에 취임하고, 그 해의 5월 마르케리타와 결혼했다. 두 사람이 모두 23세로 이듬해 3월에는 장녀 비르지니아가, 그 다음해 7월에는 장남 이치리오가 태어났다. 그러나 이치리오가 태어난지 1개월 후 장녀 비르지니아가 병에 의해서 생후 17개월만에 죽게 되었다. 베르디는 슬픔을 잊기 위해서 여행을 떠났다.
1839년 2월 마르게리타와 어린 이치리오를 데리고 밀라노로 출발했다. 그 무렵 그는 최초의 오페라 "로체스텔"을 작곡하고 밀라노에서 상연하고 싶었으나 좀처럼 실현이 되지 않았다. 당시의 스칼라 극장의 소유자 메렐리와 서로 알게 되어, 그로부터 직접 의뢰도 받고 다음의 오페라 작곡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들 이치리오가 병에 걸려 1839년 10월 22일에 죽자 슬픔을 달래기 위해 신작 오페라 "오베르토"의 초연에 더욱 힘썼다. 그 결과 오페라 "오베르토"는 대성공하게 되어 14회나 반복 상연되었다. 베르디는 그 후 스카라 극장이나 빈의 오페라 극장과 계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봄 이탈리아는 음울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5월 말에 아내인 마르게리타가 병으로 쓰러져 6월 18일에 겨우 27세로 수막염 때문에 사망했다.
아이들과 아내를 동시에 잃은 베르디는 매우 낙담하여 밀라노를 떠나 부세토에 틀어박혔다. 당시 작곡하고 있었던 것은 "가짜 스타니 슬라오 (또는 하루만의 임금님)"로 1840년 9월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 되었으나, 첫날의 실패 때문에 하루만에 중지되었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태에서는 뛰어난 작품이 나오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더욱 낙담하고 악보를 쓸 기력마저 잃고 자살까지 결의했었다고 한다.
1842년 3월 오페라 "나부코"가 스칼라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나부코"는 서력 전 예루살렘을 공략한 우명한 바빌로니아왕 나부코드노졸의 폭정과 바빌로니아에 유폐되었던 유태인들의 이야기로 젊은 힘이 전곡에 넘쳐 있다. 당시 29세의 베르디는 사랑하는 처자를 잃은 슬픔을 극복하고 이 오페라에 의해서 결정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곡을 계기로 이후 50년의 오랜 세월에 걸쳐 훌륭한 오페라를 작곡하여 불멸의 대작곡가로서의 이름을 남기고 첫발을 내딛였던 것이다.
베르디의 오페라는 당시의 이탈리아의 정치 정세에 영향을 받고 있는 면이 많았다. 남달리 다감한 베르디가 이 시대의 애국적 풍조에 자극되지 않을리가 없었다. "나부코"의 성공으로 스칼라 극장과 매시즌 신곡 하나씩을 작곡해주기로 계약을 맺은 베르디는 다음의 신곡으로 "롬바르디아인"을 채택했다. 11세기 제1차 십자군에서의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인의 용감성과 헌신을 사실에 기초해서 그리고 거기에 사랑을 곁들인 줄거리로 당사자로서는 대규모적인 것이었다.
1843년 2월의 첫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오스트리아의 압제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어 제4막의 합창 "오오, 주여, 고향의 집들을"은 압도적인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베르디가 87년간의 생애중에 만들어낸 총 26곡의 오페라에는 창작의 시기에 따라서 3개로 분류된다. 처녀작 "오베르토"(1839년)부터 제15번째의 오페라 "스티펠리오" (1850년)까지의 작품을 벨리니나 도니제티 등 선배들의 작품을 모방하고 계승한 초기의 작품이다.
베르디 자신의 개성은 제 16번째의 "리골레토"에 의해서 확립되어 제24번 째의 작품 "아이다"(1871년)에 이르기까지의 약 20년간에 중기의 작품이 전개된다. 만년의 원숙한 작품 "오텔로" (1887년)와 "팔스타프"(1893년)가 후기를 형성하고 있다. 베르디는 아내 마르게리타와 사별하고 나서 잠시 독신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나부코"의 초연의 주역을 맡아 호평을 얻은 여류 가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와 동거했으며 그녀의 헌신적인 원조에 의해서 그의 작곡능력을 완전히 향상됐다. 두 사람은 함께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12년이나 지나 1859년 8월 말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1861년부터 그는 5년간 국회의원으로 일하면서 이탈리아 3대 극장인 밀라노, 로마, 나폴리의 가극장에 재정적인 원조를 주어 오페라 진흥을 꾀했다. 그는 1840년대부터 1850년대에 걸쳐서 매년 거의 한곡씩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것이 바로 "조반나 다르코(잔 다르크)"(1845년), "에르나니"(1846년), "맥베드"(1847년), "해적"(1848년), "레냐노의 전쟁" (1849년), "루이자 밀러"(1849년), 스티펠리오"(1850년), "리골레토"(1851년), "라 트라비아타"(1852년), "일 트로바토레"(1853년), "시칠리아 섬의 저녁 기도"(1854년), "시몬 보카네그라"(1857년), "가면 무도회"(1858년), "운명의 힘"(1862년), "돈 카를로스" (1867년) 등이다.
1861년대에 들어와서 작곡 속도는 떨어졌지만 "운명의 힘", "돈 카를로", "아이다"는 베르디가 그때까지 획득한 극적 표현의 온갖 지식과 기법의 모든 정성을 기울인 것으로 그로서도 전에 없을 정도로 음악의 높은 경지에 도달한 성공한 작품이다. 1860년 베르디는 "아이다"를 작곡하고 나서 다음 작품인 "오텔로"의 완성까지 약 15년이라는 세월이 있었다. 베르디가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일에 얼마나 큰 어려움과 노력을 강요당했던가를 15년의 공백이 얘기해 주고 있다.
1883년 바그너가 사망하고 나서 베르디의 새로운 오페라의 구상은 구체적인 형태를 취했다. "오텔로"를 들었던 많은 청중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베르디가 나타난 것에 놀라 "베르디는 오텔로에 의해서 바그너로부터의 결정적인 방향 전환을 했다"고 말했다. 또 "베르디의 음악은 민족적 전승이라는 점에서는 아이다까지이다."라고 말하는 음악 평론가도 있을 정도이다. 이 의견을 완전히 긍정할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 올바른 심리적 핵심을 찌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베르디의 아내 주세피나가 1897년 11월에 폐렴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그는 완전히 고독해졌다. 아내의 사망 전부터 베르디의 건강 상태는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창작 능력은 떨어지지 않고 1898년에는 "코러스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4개의 종교곡 (성가4편)"을 완성시켰다. "팔스타프"에서 희극을 소재로 선택한 것은 희극의 영역에서 옛날의 실패를 회복하기 위해서 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후 1901년 1월 21일 오전 하인이 의식을 잃고 침대에 쓰러져 있는 베르디를 발견했다. 그때의 발작을 최후로 1월 27일 오전 2시 50분에 사망했다.
작품경향
죠세프 베르디는 밀라노 음악원 시험에 낙방 후 파이지엘로의 제자인 라비냐에게서 개인수업을 받음. 1836년 부쎄토 시립오케스트라와 음악학교의 지휘가가 됨. 같은 해 후원자 바렛찌의 딸과 결혼. 주로 오페라 작곡가로 활동. 그의 교회관련적 음악들은 오페라가 갖는 극적인 요소들을 포용. 미사, 작은 합창곡등도 남김. 1839년 그의 첫 번째 오페라 [오베르토]를 밀라노에서 상연하여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불행한 사건들(부인과 아이의 사망) 속에서 쓰여진 부파소재의 두 번째 오페라인 [왕궁의 하루, 1840]는 실패.
그의 세 번째 오페라 [나부코, 1842]는 대성공을 거둔다. 이 작품의 심각하고 극적인 양식은 이후 베르디 작곡방식의 모델로 정착한다. 또한 이 작품의 애국적인 소재는 한동안 지속되어 10여 개가 넘는 작품들에서 계속 나타난다. 다른 한편으로 베르디는 문학적 소재에도 관심을 가져 [멕베드], [루이자 밀러] 등을 작곡한다. [루이자 밀러]를 제외한 대부분의 오페라는 특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나 그의 드라마 발전과정에서 모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베르디는 1849년부터 부쎄토 근교에 산타가타 농장을 구입하여 여가수 스트렙포니와 함께 생활한다(결혼 1859).
베르디의 작곡활동은 50년대에 서로 다른 성격의 세 오페라를 통해 절정에 도달한다: [리골렛토](성격극), [일 트로바토레](성악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성격극과 성악오페라의 합성). 원래 1858년 나폴리를 위해서 쓰여졌으나 검열을 피해 1859년 로마에서 상연된 [가면무도회]도 상당한 성공을 거둔다. 이후 긴 시간 간격들을 두고 세익스피어의[멕베드]제2판과 쉴러의 [돈 카를로스] 등이 쓰여졌다. 이들 작품에서 실험적으로 준비되던 것들은 1870년 수에즈운하의 개통을 축하하기 위해 쓰여진 [아이다]에서 결정체로 나타난다. 지금도 이 오페라는 창의력, 구성, 음악적 긴장, 형식을 가장 잘 조화시킨 작품으로 평가된다.
1873년에는 [현악4중주 e단조]가, 그리고 1873/74년에는 소설가 만죠니의 추모를 위해 [레퀴엠]이 작곡된다. 이 레퀴엠의 초연 이후 오랫동안 베르디의 작곡활동은 중단된다. 1879년이 되어서야 베르디는 보이토의 권고로 다시 오페라를 쓰기 시작하여 [오텔로]를 작곡한다. 그리고 그의 나이 80세에는 서정코믹작품인 그의 마지막 오페라 [팔스타프, 1893]를 작곡한다. 아내의 죽음(1897)을 전후에는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테데움]과 [스타바트 마테르]도 쓰여진다.
베르디는 밀라노에 음악인들의 양로원인 '휴식의 집'을 설립하고, 그의 작품에서 나오는 모든 수입을 그 기금으로 사용했다. 베르디는 로씨니, 벨리니, 도니제티의 음악스타일을 따르면서도 단순하면서 힘있고 긴장감 있는 자신의 음악스타일을 발전시킨다. 일찍부터 반(半)대본가로도 활동해 그가 원하는 대로 운율 하나 하나에 이르기까지 그의 대본들의 제작에 깊이 관여했다. 대오페라의 요소인 청각적이며 무대적인 효과들도 그의 오페라에 적용시켰다. 하지만 그의 오페라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 내적인 감정들에 대한 표현과 상황에 맞게 세밀하게 구성되는 멜로디에 있었다. 그의 가장 개성적인 오페라 스타일의 하나는 복합선율적인 앙상블로 긴장이 가장 고조되는 부분에서 서로 대립되는 선율들을 대치시켜 동시에 울리게 하는 것이다.
점차 베르디에게서 음향기법이 다소 풍부해졌다 해도 그의 오케스트라는 한번도 극의 전체분위기를 주도해 나가는 요소로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그의 작품들에서는 바그너의 영향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자료출처: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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