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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_사랑의 인사

ㄹl브ㄱL 2008. 2. 10. 23:25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





1857~1934  작곡가. 
영국의 근대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꼽히는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 우리에게 
'사랑의인사(Salut D'amour)'로  친숙한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는 1857년 오르가
니스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처음에 법률가에 뜻을 두었으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발견한 후 열심히 음악공부를 하였
습니다. 그후 우스터 글리 클럽의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였던 그는 후에 아버지의 뒤를 이
어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했습니다. 1889년 32세 때 캐롤린 앨리스와 결혼한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는 아내의 적극적인 권유에 의해 뒤늦게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1891
년 마르번으로 이사하여 13년 동안 지내면서 창작에 힘써 점차 그의 곡이 대중에서 알려
지기 시작했습니다. 1896년 칸나나 '올라프 왕 (King Olaf)'이 북 스테퍼드 음악제에서 초
연, 주목을 받았으며 1899년에 영국에서 발표한 '수수께끼 변주곡(Variations Enigma)'
은 그에게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해 주었습니다. 또한 1900년 버밍검 음악제에서 초
연한 오라토리오 '제론티우스의 꿈 (Dream Of Gerontius)'는 당대 최고의 작곡가였던 시
트라우스에게 인정받은 명곡이었습니다. 
그후 두 개의 교향곡을 비롯해 첼로 협주곡, 바이올린 소나타, 피아노 5중주곡 그리고 관
현악곡 '사랑의 인사(Salut D'amour)', 관현합주를 위한 '한숨', 이번에 들려드릴 '당당
한 위풍' 및 오페라, 가곡 등 여러 분야에 걸친 작품을 남겨 영국 음악계에 큰 공헌을 했
습니다. 
이렇듯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가 작곡가로서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인 캐롤
린 앨리스의 공이 컸다고 합니다. 언제나 그에게 위로와 격려를 해준 앨리스에게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 자신도 늘 고마움을 느꼈고 그러한 생각이 음악으로 표현된 것이 바
로 '사랑의 인사(Salut D'amour)'라고 합니다. 
Pomp and Circumstance



여기서 들려드릴 행진곡 '당당한 위풍(Pomp and Circumstance)'는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 자신도 "일생에 단 한 번 나올 수 있는 곡조"라고 설명할 만큼 그의 대표작입니다. 
처음에는 새로 즉위하는 왕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 행진곡으로 만들 생각이었으나 결국 
오케스트라가 총동원되는 빠른 행진곡 '당당한 위풍(Pomp and Circumstance)'으로 탄
생합니다.
'당당한 위풍(Pomp and Circumstance)' 행진곡은 모두 5곡으로 되어 있습니다. 
1901년에 1·2번, 1904년에 3번, 1907년에 4번 그리고 5번은 1930년이 되어서야 만들어졌
습니다. 
5곡 중 대중적이면서 음악적 완성도가 높은 곡은 1번입니다. 영화에서 나오는 졸업식 
장면에 항상 나오는 음악이 바로 1번입니다. '당당한 위풍(Pomp and Circumstance)'
과 관련해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는 다음과 같이 얘기했습니다.
 "나는 작곡가의 천직을 옛날 이탈리아의 음유시인이나 켈트족의 서정시인이 했던 것처
럼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 당시에는 군대에 앞장서서 분위기를 돋우는 것이나, 노래로 
사람을 고취하는 것이 수치가 아니었습니다. 음악으로 행사를 축하하고 싶어하는 사람
이 많습니다 난 그런 사람에게 음악을 선사할 뿐입니다." 영국기사의 칭호를 받은 그는 
영국낭만파와 근대 음악을 알맞게 혼합한 듯한, 영국다운 건실한 작품으로 영국 클래식
의 자존심을 세워준 작곡가였습니다. 
엘가의 본래 영역은 합창을 이용한 오라토리오, 칸타타 등이었으나 교향곡, 협주곡 등 
관현악작품에서 수완을 발휘했으며 의 음악은 슈만, 브람스로부터 화성의 영향, 바그너
로부터 반음계주의의 영향 등, 후기 낭만파의 영향을 받아, 영국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
하였습니다.
대표작품으로 《수수께끼 변주곡》, 
오라토리오 《제론티우스의 꿈》, 《위풍당당 행진곡》과 
바이올린과 피아노곡 《사랑의 인사》 등이 있습니다.

 Edward Elgar cruise


에드워드 엘가는 영국 서남부 우스터 근처의 브로드히스에서 태어났다. 
영국의 전형적인 시골이라 할 브로드히스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엘가의 삶과 음악 전체
를 지배했다. 
엘가의 아버지는 피아노 조율사이며 악기점 주인이기도 했는데 나중엔 성당의 오르가
니스트를 지낼 만큼 음악적인 재능도 갖추고 있었던 듯하다. 
에드워드 엘가는 네 번째 아이로 태어났으나 첫째가 15살에 성홍열로 죽었으므로 위로 
두명의 누나를 두고 에드워드는 장남이 되었다. 
그의 아래로는 음악적인 천재로 알려진 동생이 어려서 죽고, 후에 아버지의 가게를 물
려받는 남동생과 도미니크 교단의 수녀가 되는 여동생이 더 있었다.
어린 시절의 엘가는 예술적인 감각과 관심이 있긴 해도 음악적인 특출난 천재는 아니
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평화스러운 시골에서 엘가의 재능은 평범한듯 두드러지지 않게 발전
해갔다.엘가의 교육은 사실상 그의 나이 15살때 끝났다. 
소년 엘가는 스스로 만들어낸 대본으로 가족들과 연극을 꾸미고, 습작에 불과하긴 해
도 작곡이란 것에 관심을 갖고 틈틈히 시도해보길 쉬지 않았다. 그러나 음악은 거의 
독학으로 익혔다. 
아버지 가게안의 악기는 모두 다루어봤고 특히 바이올린 연주에 뛰어났다. 
카톨릭 계통의 지방 학교가 엘가의 음악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음을 생각할 때 그
의 아버지와 그의 가게는 음악의 길을 열어주는 유일한 출구였던 셈이다. 단, 바이올
린에 한해서 그는 우스터와 런던의 선생에게서 정식으로 레슨을 받은 기록이 남아 
있다.5살이 되면서 엘가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라이프치히에서 음악공부를 계속하려는 계획도 있었지만 그의 집안형편이 그것을 허
락치 않았던 것이다. 어린 시절의 엘가는 무엇이든 대단하고 유명한 인물이 되고 말겠
다는 꿈이 있었다 한다. 
그리하여 겉봉에 아무런 주소를 쓰지 않아도 자신의 이름 하나면 우편물을 받을 수 있
도록. 이 순진한 꿈은 아주 먼 훗날에 이루어지긴 했으나 그러기까지 엘가는 신념이 흔
들리기에 충분한 무명의 시대를 거쳐야 했다.엘가의 이름이 작곡가로서 처음 널리 알
려지게 되는 것은 그의 나이 42살 때 <수수께끼 변주곡>을 발표하면서 부터다.
작품이 완성된 1899년 런던에서 이 곡을 초연했던 한스 리히터(Hans Richter)로부터, 
바인가르트너 · 니키쉬 · 쉬타인바흐 · 토스카니니 · 쉬트라우스 · 말러 등 내노라하는 
지휘자들의 연주 프로그램에 <수수께끼 변주곡>이 빠지지 않았던 기록이 말해주
듯, 엘가의 성공은 이제 의심할 수 없기 확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공한 음악가로 자리잡은 이후에도 종종 사로잡혔던 지나친 자의식과 음악가
로서의 갈등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비전 속에 있던 젊은 엘가를 수없이 괴롭히곤 
했다. 엘가가 만일 자신의 음악성에 대해, 혹은 세상에 대해 가졌던 그 많은 갈등에만 
사로잡혀 있었더라면 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엘가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지나친 자의식으로부터 그를 해방시킨 사람은 다름 아닌 엘가의 아내캐롤라인 
앨리스 로버츠(Caroline Alice Roberts)였다 

캐롤라인 앨리스 로버츠 (Caroline Alice Roberts) 였다.


 

위대한 인물의 생애에서 우리는 종종 그 인물을 위대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또다른 "위대한 인물"을 만나곤 한다. 엘가의 아내 앨리스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엘가는 이 평생의 연인을 그의 나이 29살때 처음 만났다. 야심에 찬 시골 작곡가인 
엘가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온 앨리스는, 엘가와는 사회적 계층부터가 른 육군소
장이며 기사 가문의 딸로서 그보다 9살이 더 많았다. 
소설과 시에 재능을 지녔고 독일어를 알았던 앨리스는 교회 합창대에 속해 있었다. 
피아노 연주 솜씨는 보통 정도였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처음부터 엘
가의 소심하고 어두운 심성, 예민한 성격을 간파하고 그를 사랑했다는 점이다. 
1889년 5월에 그들은 결혼했다.

 The Sir Edward Elgar statue


<수수께끼 변주곡>을 포함해서 엘가 의 중요한 작품들은 거의 모두가 앨리스와의 
결혼생활 중에 작곡되었다. 
"브라우트(Braut, 엘가가 붙여준 앨리스의 애칭)가 이 곡을 만드는 데에 준 도움은 
정말 막대하답니다"
엘가가 그의 아내에게 공을 돌리는 이러한 말은 편지를 비롯한 다양한 기록의 도
처에서 발견된다. 
엘가가 그의 아내에게 얼마나 절대적인 힘을 얻고 있었는가는 앨리스가 세상을 뜬 
후 말년의 15년간 그가 이렇다할 작품을 쓰지 못했다는 사실이 입증하고 있다. 결
혼 전 엘가는 짧은 곡들을 재빠르게 써내곤 했다. 
그의 작곡 스타일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때의 엘가에겐 큰 규모
로 곡을 확대시킬 능력이 없는 듯 했다. 
엘가 최초의 중요한 작품 <프로와사르>(Froissart)서곡은 결혼 1년만에 작곡
되었다. 
소나타 형식의 이 서곡엔 아직 엘가가 좋아하고 자주 썼던 "품위있게"(nobilmente)
라는 지시어는 나오지 않지만초기작품의 특징인 재치있는 멜로디와 리듬은 높은 
수준을 보인다.
엘가의 초기 창작기라 할 1890년대에 엘가의 에너지는 거의 성악곡 작곡에 바쳐졌
다. 칸타타 <흑기사>(The Black Knight), 오라토리오 <생명의 빛>(The Light 
of Life), 극적 칸타타 <올라프 왕> (King Olaf) 등, 주제의 선택에 있어서나 곡
의 진행에 있어서 엘가의 특징이 자리를 잡아가는 작품들이 이무렵에 쓰여졌다. 
그러나 엘가의 진정한 목표는 성악곡이 아닌 대규모 관현악 작품을 쓰는 데 있었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또 영국의 합창단이 즐겨 레퍼토리로 택하는 성악곡의 작곡자
로서 엘가의 이름은 서서히 알려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엘가는 만족감 내지는 자신
감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오케스트라를 위한 오리지널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엘가에게 있어서 중요한 획
을 긋는 작품이 되었다.
 "수수께끼"(Enigma)로 얘기되는 곡의 주제는 그동안 수많은 설명과 추측을 거쳐이
제는 작곡자 자신의 초상과 창조적인 예술가의 고독감을 그린 것이라는 설이 일반화
되어 있다. 
작품에서 장조와 단조의 대비는 작곡자의 내면과 외향을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감춰진 주제가 진정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은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엘가는 작품을 구성하는 14개의 변주에 가까운 사람들의 이름을 붙여 헌정했다. 
거기에는 엘가와 함께 실내악을 연주하곤 했던 피아니스트의 이름도 있고, 지방의 
지주나 엘가를 찬미했던 젊은 아가씨의 이름도 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로 첫
번째 변주곡은 아내 앨리스를 위해서, 마지막 변주곡은 엘가 자신을 위해서였다.

 Maison natale d'Edward Elgar à Upper
 Broadheath, près de Worcester


수수께끼 변주곡>이 작곡가로서 엘가의 이름을 최초로 널리 알린 작품이었다면
1900년에 발표된 엘가 최고의 성악 걸작 <제론티우스의 꿈>(The Dream of 
Gerontius)은 그 명성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든 작품이라 할 것이다.
뉴만 추기경의 시를 토대로 쓴 오라토리오 <제론티우스의 꿈>은 죽음을 맞은 
한 노인이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되기까지의 신비롭고 극적인 내용으로 짜여지지만, 
어쩔 수 없이 작곡가 내면의 갈등을 표출시키고 있다. 
확고한 신앙과 특정 사회계층의 소속감을 가질 수 없었던 엘가였던 만큼 작품의 
전반을 지배하는 절망감과 의심은 그대로 작곡가 자신의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론은 긍정적인 쪽이어서 후반부에서 우리는 내세에 대한 비전을 보게 
된다.<제론티우스의 꿈>은 당연히 신학적인 면보다는 예술적인 면을 중시해야 
할 작품이다. 
그렇긴 해도 인간의 원죄설등에 강한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엘가의 작품
은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것이 틀림없었다. 
리하르트 쉬트라우스가 엘가를 "영국 최초의 진보주의자"로 극찬한 것은 바로 
<제론티우스의 꿈>이 독일 초연된 때였다. 의심하고, 갈등을 겪고, 자주 세계
로부터 소외의식을 느꼈던 엘가가 지극히 공적이고 대중적인 작품들도 다수 남기
고 있다는 사실은 언뜻 모순처럼 보인다. 이런 느낌은 비단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던지엘가는 대중적인 작품을 쓰는 일이 자신의 소신과 
어긋나지 않음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음악으로 행사를 축하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음악을 선사했다. 그것이 잘못일
까. 사람들이 뭔가 자극이 될 것을 원할 때 아무에게도 호소력이 없는 푸가 따위
를 작곡해서 무엇할 것인가"엘가가 쓴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인 작품은 아무래도 
<위풍당당 행진곡>(Pomp and Circumstance Marches)일 것이다. 모두 5곡
으로 구성되는 이 행진곡집에서 가장 유명한 제 1번은 후에 가사를 붙여 <희망과 
영광의 나라>로도 불려졌다. "일생에 단 한번 나올 수 있는 곡"이라 자부했던 
이 행진곡을 엘가는 사실 교향곡의 멜로디로 쓸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 행진곡으로 사용하려 했던 것인데, 그의 목적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고, 대신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그의 이름을 알려지게 만드
는 빠른 템포의 행진곡으로 탄생되었던 것이다. 
<위풍당당 행진곡>의 타이틀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델로>에서 인용
되었다. 
베르디, 마이어베어 등의 곡과 더불어 가장 기품있고 우아한 행진곡으로 꼽히는 
이 곡에서 우리는 소심하고 위축되기 쉬웠던 엘가가 아닌, 영국의 전체 국민들이 
사랑하는 성공한 음악가로서의 엘가를 느낄 수 있다. 1904년 말엽에 엘가는 기사 
작위를 받게 된다. 동시에 엘가 가족은 우스터로부터 헤레포드 근방의 큰 저택으로 
이사하였다. 이보다 앞서 엘가는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콘서트 서곡 <남국에서>
(In the South)를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다. 
3월에 열린 엘가의 페스티벌은 국왕 부처가 참석한 가운데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버밍검의 새로 생긴 대학의 교수직까지 맡게 된 "엘가 경"은 이제 작곡가로서 정상
의 위치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엘가의 소망이던 교향곡은 아직 한 곡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1903년 버밍검 페스티벌을 위해 썼던 오라토리오 <사도행전>(The Apostles)은 
지나친 계획의 비대함으로 실패로 끝났고,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에 
필적한 작품을 쓰려했던 야심이 불발되자 엘가의 순수 관현악곡에 대한 집념이 
다시 고개를 들게 되었다.
1905년 <서주와 알레그로>(Introduction and Allegro)로 자신의 역량이 충분
함을 확인한 엘가는 1907년, 드디어 <교향곡 제1번>을 쓰기 시작했다. 
이 곡의 첫 악장은 엘가 작품의 상징과도 같은 "품위있고 간소하게"(Nobilemento 
e semplice)의 지시어로 시작된다. 
첫 악장과 끝 악장의 소나타 형식과 함께 이 곡에서 엘가의 특징이 두드러지는 악
장은 두개의 가운데 악장이다. 
작품을 헌정받았던 지휘자 한스 리히터는 이 곡을 베토벤의 느린 악장과 비교한 
바 있지만 실상을 말한다면 엘가 특유의 소박하고 따뜻한 위풍이 담겨 있다. 
1910년에 완성된 <바이올린 협주곡>의 느린 악장도 단순하고 차분한 아름다
움에 있어서 뒤지지 않는 작품이다. 
그러나 엘가가 그의 두번째 교향곡을 발표했을 때 그의 음악은 열렬히 환영받는 
걸작도, 시대를 앞서가는 화제작도 아니었다.엘가는 국가로부터 최고훈장인 공로 
훈장을 받는 영광을 누렸고, 1912년엔 런던의 고급 저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간간
히 그는 <영국 행진곡>, <인도의 왕관>등의 작품을 쓰긴 했어도 이전의 
작품과 같은 수준의 걸작은 쓰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1차 세계 대전,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처럼 엘가는 전쟁으로 인한 심적 부
담감을 겪었고 창작은 점점 어려운 지경이 되고 있었다. 여기서 구원은 다시 한번 
그의 아내 앨리스로부터 왔다. 
슬럼프에 빠진 엘가를 위해 서섹스의 작은 오두막 "브링크웰즈"를 찾아낸 것이다. 
엘가는 그곳의 숲을 산책하고 자연을 통해 휴식을 취하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
을 수 있었다. 
당연하게 이것은 새로운 걸작을 탄생시켰다. 1918년의 <바이올린 소나타>와 
1919 년의 <첼로 협주곡>은 바로 브링크웰즈에서 작곡된 엘가 만년의 걸작
들이다. 특히 <첼로 협주곡>은 작곡가 내면의 사상이 간결하고 절제된 형식으
로 표현된 작품인데다가 구세대 작곡가로 전락될 위기에서 그를 구해줄 만큼 새롭
고 정력적인 협주곡이었다.첼로 협주곡>이 
초연된 5개월 후에 엘가는 아내를 잃었다. 
그것은 단순히 가정적인 불행의 차원이 아닌 엘가 창작생활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
이었다. 
만년에 맺은 버나드 쇼와의 우정을 계기로 다시 한번 작곡을 시도해보긴 했지만 
주목할 만한 결과를 낳지는 못했다. 엘가는 이후 15년을 외롭게 살다가 1934년 
2월 23일에 세상을 떴다.


엘가는 그의 생존시에도 그랬지만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위대한 작곡가로 존경받는다. 
또한 그는 영국의 민요를 소재로 하지 않았으면서도 민족주의 음악가와 같은 대우
를 받는다. 
이는 그의 음악언어가 지극히 영국적이었다는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의 따
뜻한 선율의 합창곡이 특히 영국 곳곳의 합창단에 의해 자주 불려지는 까닭도 같
은 데에 있다. 
엘가의 음악을 특징짓는 것으로 따뜻함 못지 않게 확연한 것이라면 거의 언제나 
감지되는 우울함이라 하겠다. 빅토리아 시대와 1차 세계대전의 혼란을 겪은 동시
대인들이 가졌을 당혹감, 종교적 사회적으로 엘가를 붙어다녔던 괴리감그리고 
예술가의 천성으로 그가 느꼈던 고독감 등은 어둡고 슬픈 색조로 엘가 작품 저변
에 언제나 깔리곤 했다.
엘가를 영국적이라고 할 만한 또 하나의 근거는 그의 음악언어가 영어의 억양과 
흡사하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인지 성악곡이 아닐 때조차도 엘가의 음악은 늘 은근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연상케한다.엘가의 이 "목소리"는 《사랑의 인사》(Salut d'Amour)
와 같은 바이올린 소품을 통해 그지없이 친근한 어조를 띠기도 한다. 이 사랑스런
 멜로디가 갖는 매력이야말로 <위풍당당 행진곡>에서의 당당한 기품과 함께 
그의 이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드는 핵심일지도 모른다. 
모든 음악적 배경을 떠난다 해도 사랑의 인사만큼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을 
이 세상 어디에서도 달리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

 Elg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