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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어린이들의 아버지
방정환 선생님은 동화 작가로서 뿐 아니라 어린이날을 만들어 내고, 색동회를 조직하여 어린이 인권 향상을 위해 평생을 몸 바친 어린이 문화 운동가, 사회 활동가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방정환 선생님은 <어린이>지를 만들어 세계 어린이 문학을 번역 ·소개하고, 이원수, 윤석중 같은 소년 작가를 길러 내기도 했으며, 이태준이라는 천재 작가를 취직시켜 작품 활동을 돕기도 했다. 또 투고된 원고가 없을 때는 스스로 여러 개의 가명을 쓰며 여러 이야기를 직접 쓰기도 했다. 근대적 의미의 '어린이 문학'이라는 게 거의 없던 시절, 우리 어린이 문학의 씨앗을 뿌린 매우 귀한 분이라 할 수 있다. 방정환 선생님이 쓴 <만년 샤쓰> <양초 귀신> 등은 초등학교 읽기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만년 샤쓰>는 제목이 참 특이하다. 내용을 읽어 보지 않고서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주인공인 창남이와 창남이 어머니는 자신도 입을 옷이 없지만 불이 난 이웃을 위해 자기 옷을 벗어 준다. 창남이는 그것도 모자라 추위에 떠는 어머니를 위해 자기 셔츠를 벗어 드리고 학교에 온다. 추운 겨울에 저고리만 입고 학교에 온 창남이. 그런데 체육 시간에 선생님은 체력을 키우자며 저고리를 모두 벗게 합니다. 결국 창남이의 맨살이 드러났고 선생님과 아이들은 뒤늦게 창남이의 사정을 알고 눈물을 흘리고 만다. 이 작품에서 '만년 샤쓰'란 맨몸을 의미한다. 우리 몸의 살갗은 평생 동안 우리의 셔츠가 되지 않던가. 오래 전 이야기이지만 현대의 아이들은 창남이의 뜻 깊은 행동을 보고 감동을 하게 된다. 어린이들이 문학 작품을 읽고 감동하는 것은 어른들처럼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며 감동하는 것이 아니라 한 '아름다운 인물'에 대해 감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방정환 선생님의 동화는 시대를 뛰어넘어 어린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현재 출판되어 있는 방정환 선생님의 작품집 중 <사랑의 선물 1>은 주로 선생님의 창작 동화나 옛 이야기가 실려 있고, <사랑의 선물 2>는 창작 동화 보다는 외국 동화를 번안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방정환 선생님은 뛰어난 동화 구연가이기도 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처럼 볼 것이 별로 없던 시절, 방정환의 이야기는 큰 구경거리였다고 한다. 이렇듯 재주 많고, 할 일 많았던 방정환 선생님은 33살의 짧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방정환 선생님의 못 다한 일들은 이후 많은 작가들이 이어 받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작가들의 작품에 감동받은 수많은 어린이들이 또다시 그 일을 이어받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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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방정환은 33세로 생을 마치기까지 어린이를 위해 온갖 정성을 쏟은 애국지사로, 위대한 교육자인 동시에 아동 문학의 선구자이다. 짧은 생애였지만 그를 떠나서 한국의 아동 문화, 아동 문학의 출발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는 어른의 소유뮬로만 취급 받아온 어린이를 인격적인 존재로 끌어올리기 위해 다양한 사회 운동을 전개하였고, 어린이들의 마음에 사랑, 눈물, 용기, 기쁨을 키워 주기 위한 동화, 소설, 시 등 아동 문학을 일으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소파는 1899년 서울 야주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와 누이를 잃고 새어머니가 들어왔으나 정을 못 붙이고, 그 대신 그림그리기와 글짓기에 재미를 얻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9세 때 종조부의 사업 실패로 그의 집이 파산을 맞게 되어 견디기 힘든 불행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소학교 학생인 10세 때 `소년 입지회`라는 소년회를 조직하여 토론, 연설의 수련을 쌓아 가기 시작했다. 1914년, 선린 상업 학교에 들어갔지만 2년 만에 그만두고 열여섯 나이에 벌써 `청춘` 지에 글을 투고했다. 19세에 천도교 교주이며 독립 운동가인 손병희의 사위가 되면서 비로소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그는 일본에 건너가 도요 대학 철학과에 다니며 아동 문제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1921년 서울에서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하면서부터 어린이에게 존대말을 쓰기로 하는 등 본격적인 소년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전국을 두루 다니면서 강연을 하는 한편 세계 명작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펴내기도 했다. 1923년에는 한국 최초의 아동 잡지인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그 해 5월 1일 어린이날을 제정하여 `어린이날` 운동을 범 사회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어린이`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쓰였는가는 분명치 않지만 현재까지의 기록으로는 방정환 번역시의 장르 소개 명칭으로 처음 소개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는 각종 대회, 강연회, 강습회를 주관하면서도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끊임없이 다양한 형태의 글을 발표하였다. 소년 운동이 좌익 세력에 의해 자기의 참뜻과 차츰 달라진 1928년부터 일선에서 물러나 오로지 잡지와 동화 순례 강연으로 자기 길을 걸었다. 당시 그의 동화는 전국적으로 유명하여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도 사방에서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일화가 있는 데, 그의 이야기가 너무도 재미있어서 차마 그 자리를 뜨지 못하고 고무신을 벗어 오줌을 눈 어린이도 있었다고 한다. 1931년 서른 세 살의 나이로 그는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초지일관 어린이를 사랑하고 어린이의 미래를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방정환의 활동 ♧ 아동 잡지 < 어린이 >
♧ 외국 동화의 소개 -- 1922년〈안데르센 동화〉,〈그림 동화〉,〈아라비안나이트〉중에서 선정한 몇몇 작품들을 초역하여 세계 명작 동화집인 〈사랑의 선물〉을 번안, 출간하였다. 이 동화집이 우리말로 씌어진 첫 동화집이며 창작 동화의 실마리가 되었다. 방정환의 작품 세계 -- 그의 유명한 수필 〈어린이 찬미〉(1924)에서는 어린이를 "죄 많은 세상에서 죄를 모르고 더러운 세상에 나서 더러움을 모르고 부처보다도 예수보다도 하늘 뜻 그대로의 산 하느님"이라고 하였다. 소위 '동심천사주의문학'이라고 하는데 이는 당시 식민지하의 냉혹한 현실을 바로 보지 못했다는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방정환 문학에 대해 `영웅주의'와 `눈물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작품이라고 비판들 하였지만 그는 우리 아동 문학의 어머니임에는 틀림없다. 방정환은 누구보다도 먼저 아동 문학의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수많은 작가를 길러 내었다. 비록 33세의 짧은 나이에 요절을 하고 말았지만, 방정환과 깊은 인연을 맺고 방정환의 뒤를 이어 방정환 문학의 한계를 극복해 낸 작가들이 많이 나왔다. |
1. 머리말
방정환은 우리 근대 아동문학사에서 첫 자리를 차지한다. 비록 짧은 삶을 살았지만, 그는 너무도 많은 일을 했다. 뛰어난 언론·출판인이며 어린이운동가였고, 동화구연가요 아동문학가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정환을 어린이날을 만든 사람 정도로 떠올릴 뿐, 근대 아동문학 개척기에 그가 펼친 다양한 활동과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이 글에서는 '어린이운동가' 방정환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가 김기전과 함께 조직한 천도교소년회는 우리 어린이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방정환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소년회가 어떤 배경에서 조직되었고, 이후의 어린이운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방정환이 펼쳤던 어린이운동 전반에 대해서는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심각해진 무산 소년운동단체 오월회와의 대립이나 이후 활동에 관해서는 다루지 못했다는 것을 먼저 밝혀둔다.
2. 방정환과 천도교
우리 근대 아동문학은 《어린이》창간(1923년 3월)으로 본격화되었다. 방정환은 《어린이》를 창간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짓밟히고 학대받고 쓸쓸스럽게 자라는 어린 혼을 구원하자. 이렇게 외치면서 우리들이 약한 힘으로 일으킨 것이 소년운동이요 각지에 선전하고 충동하여 소년회를 일으키고 또 소년문제연구회를 조직하고 한편으로 《어린이》잡지를 시작한 것이 그 운동을 위하는 몇 가지의 일입니다. (방정환, 《어린이》 동무들께,《어린이》(1924년 12월), 강조는 인용자.)
이 글을 보면 1920년을 전후로 전국 각지에 활발히 조직되던 소년회와 우리 근대 아동문학이 어린이 운동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동아일보를 비롯한 신문들과 《어린이》에 그 당시 지역마다 소년회가 만들어지는 상황과 활동들이 계속 실렸던 것으로도 뒷받침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우리 어린이운동사에서 방정환과 천도교의 만남이 갖는 중요성이다. 방정환은 손병희의 셋째 사위가 되면서(1917년) 천도교와 깊은 인연을 맺는다. 손병희에게 방정환을 소개한 사람은 3·1운동의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천도교측 대표인 권병덕이다. 방정환의 아버지 방경수는 권병덕과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절친했는데, 둘은 모두 천도교의 한 분파인 시천교(侍天敎)를 믿었다. 권병덕이 시천교에서 천도교로 개종하면서 방경수 역시 천도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방정환의 생애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지만 새롭게 고쳐 쓰고 보완되어야 할 부분들이 뜻밖에 많다. 이 부분 역시 좀더 자세한 조사가 필요하다. 어쨌든 방정환은 손병희의 사위가 되면서 토지조사국 사자생(寫字生)의 가난한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손병희가 세운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가난으로 중단했던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시기에 그는 천도교 청년회의 한 사람으로 순회강연을 다니며 청년운동을 했다. 3·1운동 때에는 보성전문학교 윤익선 교장이 체포되어 발행이 중단된 독립신문을 제동 처가집에서 비밀리에 인쇄·배부하고, 독립선언서를 몰래 돌리다가 검거되기도 했다.
그 후 일본으로 가서 천도교 청년회 도쿄 지회장으로, 《개벽》의 특파원으로 활동했다.(1920년) 또한 도쿄의 토오요오(東洋)대학 철학과에 적을 두고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연구하면서(1921년) 본격적으로 어린이운동을 구체화시킬 수 있었다.
이처럼 방정환은 결혼을 한 다음 청년운동과 어린이운동, 민족운동에 깊이 관여한다. 물론 이러한 활동은 방정환이 어릴 때부터 키워왔던 사상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가 그러한 사상을 적극적으로 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천도교의 정신적·물질적·조직적인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910년대와 20년대에 천도교는 우리 사회에서 매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대부분 사회단체는 심한 탄압을 받았는데, 종교단체는 그나마 좀 자유로울 수 있었다. 천도교는 그런 조건을 이용해 겉으로는 교단 활동을 내세우면서 사회 활동을 수행했다. 천도교는 3·1운동 당시 기독교와 불교계 지도자들을 조직하고 민족 대표 가운데 16명이나 참여할 정도로 주도적이었다. 특히 다른 어느 종교단체보다 각 지방에 조직화가 잘 되어 있던 터라, 천도교측은 그것을 바탕으로 전국적인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천도교는 의암 손병희가 일본에서 귀국(1906년)하면서 언론·출판사업과 교육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하여 1920년대에는 이 두 사업을 중심으로 한 신문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그 방편으로 1920년대 사상계를 주도한 종합 월간지 《개벽》을 비롯해 《어린이》《신여성》《별건곤》《학생》《혜성》《조선농민》 따위의 출판물을 발행했다. 이 출판물들은 천도교 청년회(1923년 9월에 천도교청년당 창설)에서 전개한 사회 부문운동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이들 대부분 출판물에 방정환은 편집 겸 발행인, 주요 집필자로 관여했다. 특히 어린이운동과 관련해서 《어린이》를 편집발행했다.
3. 천도교소년회의 조직과 의미
먼저 천도교에서 부문운동을 제기했던 배경과 그 하나로 '천도교소년회'가 조직된 유래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리 당의 목적이 역(亦) 창생을 제도하는 데에 있을 것은 물론이다. 하물며 우리 도의 주의 목적을 사회적으로 달성할 것을 당헌 제 1조에 명언하였음이리오. 그러나 창생은 수에 있어 억(億)으로 산(算)할 수 없고 이해에 있어 일양(一樣)이 아니니 이를 상대하며 이를 영도하는 묘방이 없을 수 있으랴. 여기에서 스스로 부문운동을 생각하게 된다. 즉 우리의 주위에 사는 창생의 수가 그같이 많고 이해가 그처럼 불일(不一)하다 할지라도 그를 이모저모로 같은 것은 같은 데에 다른 것은 다른 데에 류(類)를 갈라서 생각하여 보면 그렇게 복잡해서 보족(補足)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 당에서는 이를 연령, 성, 직업 등 세 가지의 편으로 유별하여 먼저 연령의 편으로 유소년, 청년을 가르고 성별로 여성을 따로 생각하고 직업별로 상민, 노동자, 농민을 들고 다시 학생이라는 한 편을 생각하여 유소년, 청년, 학생, 여성, 농민, 노동, 상민의 칠부(七部)를 두고 당본부와 지방부에는 각 부에 대한 책임 위원을 두어 일반당원과 한가지로 부문운동에 노력하게 된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우리가 당을 보직하고 당원을 훈련하는 것은 오직 이 민중의 이익을 호지(護持), 증진키 위한 당무부(黨務部)가 있는 동시에 나아가 창생을 상대로 하는 특별부서가 있는 것이니 이 창생을 상대로 하는 특별부서가 즉 칠부문(七部門)이란 것이다. (조기간, 《천도교청년당소사》, 천도교청년당본부, 1935. 38∼39쪽)
천도교는 민중을 제도하고 그들의 이익을 증진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이해가 다른 각 계층을 연령, 성, 직업별로 나누어 운동을 전개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것을 위해 일곱 개 부문을 마련했고, 그 하나로 유소년부를 두었다. 더구나 '천도교소년회'는 천도교청년당에서 최초의 부문운동으로 조직되었다.
우리 당의 부문운동으로서는 대정 10년 4월(인용자: 1921년 4월)에 어린이 정서 함양, 윤리적 대우와 사회적 지위를 인내천주의에 맞도록 향상시키기 위하여 김기전, 방정환 외 제 씨의 노력으로 '천도교소년회'를 경성에서 조직한 것이 맨 처음이요. (앞의 책, 40쪽)
아주 짧은 소개지만, 천도교소년회는 '어린이 정서 함양, 윤리적 대우와 사회적 지위를 인내천 주의에 맞도록 향상시키기 위하여 김기전, 방정환'에 의해 '부문운동 가운데 맨 처음 조직'(대정 10년 4월(1921년 4월)되었다. 봉건적 윤리의 지배를 받던 어린이를 독립된 인격을 지닌 존재로 인식한 것은 물론, 어린이의 감성 해방 역시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다. 천도교소년회의 모체인 '유소년부'의 활동 방향을 제시한 다음 글을 보면, 천도교의 어린이운동이 갖는 지향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 총괄 요항 1, 2, 3, 4항(인용자 : 청년당의 전체 강령)을 준수하는 하에서 다음 각 항을 실행할 것
- 유소년의 생리적 발육과 심리적 발육을 구속하는 모든 폐해의 교정에 힘쓸 것.
- 재래의 봉건적 윤리의 압박과 군자식 교양의 전형을 버리고 유소년으로의 소박한 정서와 쾌활 한 기상의 함양을 힘쓸 것
- 문자 교양과 평이한 과학 지식의 보급에 힘쓸 것
- 유소년의 조혼 및 과로를 방지할 것
- 간단한 사회생활의 훈련을 시(試)하여 유소년으로의 상당 정도에서 자립자율의 정신을 기르게 할 것
- 동화, 동요, 수영 등 유소년 생활에 필요한 소년예술 및 체육의 보급에 힘쓸 것 (앞의 책, 45∼46쪽)
이것은 소춘 김기전이 <개벽 운동과 합치되는 조선의 소년운동>(《개벽》1923년 5월호)이라는 논설에서 윤리적·경제적 압박으로부터 어린이들이 해방되어야 한다고 밝힌 것과 같다. 논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당시 어린이운동은 천도교의 개벽 사상에 뿌리를 두었다. 그리고 이후 소년운동협회 주최로 열린 제 1회 어린이날 기념회(1923년 5월 1일)의 선언문은 '천도교청년회 유소년부의 활동 방향'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게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히 놀기에 족한 각양의 가정 또한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 (소년운동의 선언, 동아일보, 1923년 5월 1일)
이처럼 천도교소년회는 우리 어린이운동의 본격적인 첫출발이었다. 이 말은 천도교소년회가 우리 나라 최초의 소년회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전에 이미 안변소년회, 왜관소년회, 진주소년회들이 있었다. 특히 진주소년회의 소년('어린이'라고 하기에는 연령이 많음)들은 뒷동산에 올라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쳐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신문에 보도되어 어린이운동계에 큰 자각을 일으켰고, 천도교 내에도 어린이운동에 대한 자각을 깊이 심어주었다. 당시 사회운동의 주류는 청년운동과 농촌운동이었는데, 천도교 내에서도 역시 그러했다.
이 때 방정환은 어린이운동의 중요성을 제기했다. 천도교의 지도자인 소춘 김기전 역시 방정환과 뜻이 통하여 천도교소년회는 조직될 수 있었다. 천도교소년회는 천도교의 탄탄한 조직과 재정, 방정환·김기전 같은 뛰어난 어린이운동가들의 이론적·실천적 활동, 뚜렷한 활동 목표와 그에 걸맞는 부서(유락부(遊樂部), 담론부, 학습부, 위열부(慰悅部))의 설치와 구체적 활동들로 가장 완전한 소년회로 발족하여 전국의 어린이운동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렇다면 방정환, 김기전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천도교소년회가 초창기 어린이운동사에서 왜 그토록 중요한가? 이것은 당시의 다른 소년회와 견주어 볼 때 천도교소년회가 천도교의 재정적·조직적 뒷받침 때문에 이후 어린이운동을 전개하는 데에 유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천도교소년회가 우리의 근대 민족·민중운동이었던 동학에 뿌리를 둔 조직이기 때문이다. 천도교소년회에서 표방하는 어린이의 인격과 감성 해방, 더 나아가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는 장기적인 민족운동은 천도교(동학)가 지닌 반봉건(인간평등)사상과 반침략(반제국)주의의 표현이다.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인간존중·평등사상으로, 지배계층에게 억눌려왔던 종래의 여성, 어린이, 민중을 해방시킬 수 있는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 실제로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은 [대인접물](待人接物)과 [내수도문](內修道文)에서 '어린아이를 때리지 마라.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니라'라고 하여 일찍이 어린이 존중 사상을 드러냈다. 또한 동학은 갑오농민전쟁을 통해 반봉건, 반제국주의 사상을 드러낸 바 있다. 이런 뜻에서 볼 때 어린이의 인격해방과 감성해방, 민족해방을 지향한 천도교소년회는 어린이운동의 든든한 바탕이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4.《어린이》발행, 색동회 조직, 동화구연과 강연회
《어린이》뒷 표지 안쪽에는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도와갑시다'라는 천도교소년회의 표어가 호마다 적혀있다. 그리고 '소년회 소식'이라는 난을 마련해 각 지방 소년회의 조직 상황과 활동을 《어린이》독자들에게 알리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어린이》는 천도교소년회의 어린이운동 차원에서 발행되었다. 이것은 《어린이》창간호에 이정호가 쓴 <《어린이》를 발행하는 오늘까지>(1923년 3월)라는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정호는 이 글에서 천도교소년회가 '조선소년운동의 첫고동'이었고, 그 운동에 방정환과 김기전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천도교소년회가 중심이 되어 연 각종 동화구연회나 동극대회들은 어린이들에게 건전한 놀이와 문화예술을 보급하는 데에도 이바지했다. 《어린이》에 각종 놀이와 문예물을 소개하고 있는 것도 그같은 뜻에서다. 《어린이》의 '독자담화실' 난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떤 학교에서는 졸업식 때 《어린이》에 실린 동극대본 <똑같이, 똑같이>(《어린이》1924년 1월)를 갖고 연극으로 꾸몄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한다. (《어린이》1924년 2월) 이처럼 당시 방정환이 주재한 《어린이》는 어린이문화운동을 전개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방정환이 도쿄에서 어린이문제연구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해서 아동예술을 연구하고 보급할 수 있는 전문가들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어린이문화운동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방정환이 《어린이》를 발행할 수 있었던 것도 색동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방정환이 갖가지 필명을 써가며 《어린이》지면을 채워야 했던 것을 보면, 당시 우리의 어린이 문화·예술이 초보상태였다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 상태에서 색동회의 조직은 근대 아동문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당시 방정환은 각 지방으로 돌아다니면서 동화를 구연하거나 부형과 교사를 상대로 어린이문제에 대해 자주 강연했다. 방정환의 이러한 활동은 어린이문제를 새롭게 인식하게 했으며, 어린이문화를 꽃피우는 데에 이바지했다. 더욱이 이러한 활동은 각 지방에 소년회가 조직되고 활성화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같은 상황은 《어린이》의 '소년회 소식' 난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린이》가 각지 소년회와 야학당의 소중한 읽을거리였던 것도 소년회의 활성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수원 화성소년회의 최영주나 마산 신화소년회의 이원수, 울산 언양조기회의 신고송 등은 소년회를 통해 방정환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되고 이후 아동문학가나 아동문학잡지의 편집·발행인으로 활동한다.
이처럼 《어린이》는 우리 아동문학가들이 태어나서 자란 터전이었으며, 천도교소년회가 중심이 되어 어린이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데에도 이바지했다. 때문에 일제는 점점 확산되는 소년회 조직을 탄압했고, 각 학교 교장들은 학생들을 소년회에 가입하지 못하도록 하기도 했다. 당시의 그러한 사정은 이원수의 《5월의 노래》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당시 소년회가 민족운동의 기초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5. 맺음말
방정환은 어린이문화운동의 선구자이다. 그는 천도교소년회와 어린이문제연구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고 어린이문화운동의 한 방편으로 《어린이》를 발행했다. 또한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소년문제강연회'나 '소년지도자 대회'를 열어 사회적으로 어린이문제에 대한 자각을 불러 일으켰다. 이전까지 아무도 돌보지 않고 내버려두었던 '애놈들'을 방정환은 비로소 '어린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무대에 새롭게 등장시킨 것이다. 방정환 이전에 어린이를 독립된 인격을 지닌 존재로 인식했던 사람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찍이 천도교의 2대 교주인 해월은 어린이 존중 사상을 밝힌 바 있다. 방정환은 이같은 어린이 존중 사상을 사회 전반에 확산시켰고, 어린이운동이 어린이의 인격 해방운동이자 감성 해방운동, 나아가 '10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라'는 표어가 상징하듯 민족운동임을 일깨웠다.
방정환이 펴 나간 어린이운동은 천도교의 이념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런 점에서 그로부터 본격적으로 출발한 우리 어린이운동은 든든한 바탕 위에 세워졌다. 방정환 탄생 백 주년을 맞은 지금, 늦었지만 그가 보여준 어린이 사랑과 민족 사랑의 정신을 새롭게 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 염희경 글
어린이날 노래 윤 석 중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우리가 자라면 나라의 일꾼 굴렁쇠 · 19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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