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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물레소리

ㄹl브ㄱL 2008. 5. 19. 12:10











간디의 물레소리


진보는 삶의 단순화입니다.

델리로 오는 길은 매우 먼 여정이었습니다. 먼 여정이라는 것은 나의 여행코스가 인도 남동부의 캘커타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우선 그 거리가 멀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비행기, 기차, 자동차 등 여정의 내용이 복잡하기 때문에 멀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비행기 창문으로 인도대륙을 조감하기도 하고 피난행렬을 연상케 하는 기차역의 플레트홈에서는 사람들과 짐더미속에 파묻혀 일행을 잃고 길을 헤매기도 하였습니다. 자동차로 이동하는 일은 더욱 먼 길이었습니다. 중앙선도 없는 도로를 여러종류의 동물떼들과 함께 달리기도 하고 햇볕이 불타는 시골길에 지친 차를 세우고 마을 사람들을 가까이서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적어도 내게는 그 역동적(?)인 여정의 끝에 델리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먼 길이었습니다. 멀다는 것은 이정(里程)을 두고 한 말은 아닙니다. 델리는 인도로부터 더욱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였습니다. 대통령궁, 의사당, 각국 대사관 그리고 네루 플레이스와 사우스 익스텐션의 번화가 등으로 이루어진 뉴델리는 서구의 도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현대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멀었습니다. 더구나 델리를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인도의 근대화정책은 인도인의 삶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얀 안개꽃 가운데 붉은 장미 한송이를 꽂으면 안개꽃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가 아니면 장미꽃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가 하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 내가 당신에게 전하는 엽서는 그 질문에 대한 때늦은 답변이기도 합니다. 안개꽃과 장미, 농촌과 도시 그리고 간디와 네루의 이야기입니다.



내가 델리에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간디기념관이었습니다. 직원들도 아직 출근하지 않은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뜰에 간디가 홀로 서 있었습니다. 나는 간디와 함께 직원들의 출근을 기다렸습니다. 간디의 면모가 가장 여실하게 남아 있는 곳은 이층의 작은 거실이었습니다. 간디의 유품이 진열되어 있는 방이었습니다. 낡은 슬리퍼 한 켤레, 안경, 피묻은 옷, 그리고 그의 육신을 앗아간 총탄과 시신을 태운 재를 담았던 항아리가 낮은 조명아래 놓여 있었습 니다. 비폭력, 불복종 그리고 무소유를 몸소 실천했던 그의 면모 그대로였습니다. 아무도 없 는 기념관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간디의 초상은 적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전시되어 있는 현장사신들은 치열했던 그의 일생을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일찍이 네루가 격찬했듯이 '밑바닥을 흔드는, 급소 중의 급소를 꿰�어보는 천재'가 번뜩이고 있었습니다. 간디의 천재는 식민지 인도의 독립운동에서만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해방을 향 한 '진리의 선언'으로 승화됨으로써 더욱 찬란하게 돋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네루기념관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의 딸 인디라 간디의 방이었습니다. 네루의 '옥 중서간집'을 읽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의 서간집은 13번째 생일을 맞는 딸 인디라라 간디에게 나이니 형무소에서 띄우는 편지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엄혹한 식민지 시절을 끝내고 이제 인도의 독립과 함께 아버지는 수상이 되고 딸 인디라 간디는 그립던 아버지 옆에 방을 갖게 됩니다. 인고(忍苦)의 긴 세월을 뒤로하고 바야흐로 맞이한 인디라 의 행복을 상상하는 일은 참으로 마음 흐뭇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이은 수상 간 디여사의 정치적 성공과 실패 그리고 그녀의 아들인 라지브 간디수상의 피살에 생각이 미 치면 인도가 헤쳐나온 현대사의 전개과정이 얼마나 험난한 길이었던가를 새람 깨닫게 합니 다. 나는 네루수상의 관저였던 영국풍의 집무실과 서재 그리고 장미 한송이가 헌화된 그의 영 정을 지나서 역시 장미꽃이 아름다운 정원에 있는 그의 묘를 찾았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 . . 누군가 나를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 사람은 진정으 로 인도를 사랑하고 인도인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 . . '

인도에 대한 네루의 애정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방법'에 있어서 간디와는 엄연한 차이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간디는 인도를 이끌고 가야하 는 것은 몇 개의 근대화된 도시가 아니라 수십만개의 인도마을과 민중이라고 생각했던 반 면에 네루와 그가 중심이 된 인도국민회의파는 근대화된 도시와 엘리트를 주목하였습니다. 간디와 네루의 차이는 방법에 있어서 분명히 반대방향을 겨냥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낙후한 농촌이 근대화된 도시를 이끌고 갈 것인가 아니면 야박한 도시가 순박한 농촌을 끌고 갈 것인가 하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당신은 간디가 바이샤계급의 평민출신이었음에 반하여 네루는 부유한 브라만계급출신이며 영국의 명문 사립하교인 헤로우와 케임브리지출신이란 점을 들어 그 차이를 설명하였습니 다. 그러나 인류사의 곳곳에는 출신과 성분을 뛰어넘은 개인이 얼마든지 있음을 우리는 알 고 있습니다. 그리고 간디와 네루의 차이는 두 사람의 개인적 차이라기보다는 인도사회의 복합성이 두 사람의 인격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정작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사랑의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아무리 절절한 애정을 그 속에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에 따라 대상을 오히려 그르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의 역설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정직한 사랑의 방법은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오늘의 인도는 역시 네루의 방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델리와 뭄바이를 거점으로 의욕적으 로 추진하고 있는 인도의 개발정책에서 그것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습니다. 자체기술로 핵을 개발하고 초음속 전투기를 만들고 세계 2위의 SW수출국인 인도의 도시는 분명 그러 한 자신감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2억이 넘는 중산층의 존재도 외국자본이 놓칠 수 없는 시장임에 틀림없습니다. 아그라의 타지마할에서도 서너명의 한국상사원을 만나기도 하 였습니다. 그러나 도시가 농촌을 이끌고 가는 20세기의 근대화방식은 도처에서 실패의 흔적 을 남기고 있을뿐 아니라 그것은 인도인, 특히 인도의 농촌과 함께 가는 길은 아니라고 생 각합니다.

나는 간디의 물레 앞에서 그의 '진리의 길', 그의 '사랑의 방법'을 생각합니다. 외국제품을 불 사르느니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현명하다는 타고르의 반론에 대하여 간디는 그러한 반론에 맞서 그것을 불태울 때 우리는 수치심도 함께 태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영 어교육을 주장하는 타고르에 대해서 그는 영어교육은 결국 인도인으로 하여금 영국인이 인 도인을 대하듯이 처신하게끔 교육하게 될 것을 우려하였습니다. 그가 이끌었던 비폭력 불복종운동이 식민지 인도의 거대한 잠재력을 폭발적으로 일으켜 세 웠듯이 그의 무소유(Non-pssesion)사상은 현대자본주의에 있어서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메 시지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무소유는 간디경제학의 기본원리이며 근대경제학에 대한 강한 비 판이론입니다. 필요하지 않는 것은 소유하지 않으며 쌓아두지 않아야 한다는 그의 무소유이 론은 거대자본의 전횡을 포위할 수 있는 비폭력 불복종 투쟁의 경제학적 변용이면서 새로 운 세기의 문명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진보는 삶의 단순화'(Progress is Simplification)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경제학의 비극은 경제학이 도덕철학으로부터 유리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담스미스가 '도덕감정론'의 세계로부터 도덕철학을 버리고 '국부론'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 비극의 시작이라고 하였습니다. 생각하면 근대경제학은 그것이 가장 과학적일 때 가장 비합 리적이 된다는 치명적인 모순을 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간디의 제단을 찾아갔습니다. 제단은 그의 시신이 화장된 곳에 놓여 있었습니다. 조국 의 분리독립을 조금도 기뻐하지 않고 독립과 함께 단식에 들어갔으며 최후까지 통일인도를 호소하다 총탄에 쓰러진 간디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곳입니다. 제단에는 운 명의 순간에 외쳤던 최후의 말 한마디가 새겨져 있습니다. '헤 람'(오 신이여). 그러나 우리 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간디의 신은 진리(God is Truth)라는 사실입니다.

간디제단을 돌아 나오면서 나는 다시 인도에서 가장 많이 애용되는 릭샤를 바라보았습니다. 릭샤란 자전거로 끄는 인력거입니다. 5, 6명이나 되는 한가족이 그 좁은 자리에 가득히 올 라 앉아 있었습니다. 릭샤꾼은 매마른 궁둥이를 안장에서 들어올려 온몸으로 페달을 밟고 있었습니다. 몇 개의 도시가 수많은 농촌을 끌고 갈 수 없다는 간디의 목소리를 눈으로 보 는 듯 하였습니다.

- 신영복의 '더불어 숲'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