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365 소혁조] 길렐스의 피아노는 흔히 강철타건으로 알려져 있다. 당대의 그 어떤 피아니스트도 힘에 있어서만큼은 길렐스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어마어마한 힘으로 내리 찍는 광폭한 타건은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를 들려주고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정확한 컨트롤이 엄청난 힘과 결합하여 길렐스만의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그가 젊은 시절에 연주한 녹음을 들어보면 확실한 힘을 느낄 수 있다. 특히 1950년대 초, 중반에 녹음한 곡들에서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당시 녹음한 음반 중 가장 유명한 음반인 1957년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레오폴드 루드윅과 협연)이랄지 1955년에 녹음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프리츠 라이너와 협연)을 들어보면 숨이 막힌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힘과 스피드를 느낄 수 있다.
젊은 시절엔 주로 힘으로 밀어 부치는 연주를 한 것도 사실이지만 1970년대를 넘어 완숙미가 가해진 시기부터 아름다운 서정성을 가미한 연주로 탈바꿈하는데 성공하였다. 그의 유작으로 남겨진 베토벤 피아노 소타나 전집(전집 -4)에서 이런 부분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때론 강한 힘으로 돌진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슴 한 쪽이 시려올 듯한 감상을 느끼는 대단히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연주를 구사한다.
길렐스의 피아노가 들려주는 특징을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고도의 집중력이 발휘된 힘과 스케일, 서정성이 어우러진 연주. 그는 러시아 피아니즘의 전통을 이어받은 적자답게(이 점에서 그의 친구 리히터와 다르다. 리히터는 러시아 사람이긴 했어도 러시아 피아니즘만을 계승했다고 보기 힘들다)큰 스케일을 추구했고 그렇게 큰 스케일을 구축하기 위한 힘과 정확한 컨트롤이 뒷받침 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낭만과 서정성도 함께 내재되어 있었다.
길렐스가 주로 다룬 작곡가별 레퍼토리를 살펴보면 베토벤과 브람스,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예프 정도로 압축될 수 있다. 베토벤과 브람스는 독일 출신의 연주자들보다 훨씬 뛰어났고 그가 남긴 베토벤과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소나타는 당대 최고의 명연으로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 피아니스트답게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를 대단히 즐겨 연주했다.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은 1번에서 3번까지 모두 녹음한 몇 안되는 사례이고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은 2번은 녹음하지 않았지만 3번은 이 곡을 대표하는 명반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한 같은 시대를 살았던 프로코피예프의 경우엔 그의 피아노 소나타 8번을 초연하기도 했고 그가 프로코피예프의 곡을 연주함으로써 곡의 예술성을 불어넣어 주었다.
하지만 길렐스의 주요 레퍼토리가 베토벤, 브람스와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예프의 러시아 작곡가을의 음악으로만 국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들 작곡가의 음악을 연주한 음반들이 너무 뛰어나서 다른 작곡가의 음악이 상대적으로 빛을 못 보는 것뿐이다.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도 다루었고 슈베르트, 쇼팽, 리스트, 그리그의 곡에 있어서도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는다.
길렐스는 주로 독주곡과 협주곡을 즐겨 녹음하였다. 그가 남긴 피아노 협주곡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는 역사적인 명반들로 가득한데 한 가지 흠이 있다면 그의 피아노 소리가 너무 거침없고 강해서 오케스트라의 반주가 힘이 팍 꺾여 있는 것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베토벤,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등 어떤 피아노 협주곡을 들어봐도 그런 현상을 느낄 수 있다.
실내악 녹음은 많지 않다. 이 점에 있어서 그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리히터와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실내악 녹음의 수가 많지 않을 뿐이지 그가 남긴 실내악들은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다. 특히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송어, 브람스의 피아노 4중주 1번은 완벽 그 자체의 컨트롤로 현악기와 앙상블을 이루는데 훌륭하게 성공하고 있다.
그 외에 그의 매제인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드 코간과 함께 연주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과 9번 연주도 있는데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꼭 한 번은 들어볼 가치가 있는 대단히 훌륭한 음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길렐스가 남긴 명반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길렐스의 주요 레퍼토리는 베토벤, 브람스의 독일 작곡가의 곡과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예프라고 이야기 할 수 있고 이들 작곡가의 독주곡, 협주곡은 길렐스의 음반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우선 베토벤의 작품을 살펴보면 길렐스가 평생동안 가장 애착을 갖고 매진한 작품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와 협주곡이라 할 정도로 많은 종류의 음반이 있다. 그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는 사망 직전까지 녹음했던 DG의 음반 외에도 1960년대에 녹음한 공연실황 음반도 있다. 그 중에서 이보다 더 시원하고 강렬할 수 없다는 느낌이 오는 곡이라면 14번 월광을 꼽고 싶다. 특히 길렐스 5에디션(멜로디아)에 수록된 월광 소나타는 내가 이제껏 들어본 많은 월광 소나타 중 가장 힘이 넘치고 아름답다.
그리고 길렐스의 유작이 된 DG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음반을 빼놓을 수 없다. 어이없는 사망으로 4곡만을 남겨놓은 채 전곡 녹음을 완성하진 못했지만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십중팔구는 이 음반을 1순위로 추천할 정도로 높은 완성도와 함께 유명세를 자랑하는 음반이다. 아마 음반매장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찾는다면 탑 프라이스에 위치한 이 음반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 음반에선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중 가장 인기가 높은 3대 피아노 소나타(8번 비창, 14번 월광, 23번 열정)를 꼭 들어볼 필요가 있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개인적인 취향임을 전제로 하는데 8번은 이 음반에 수록된 것이 가장 좋고 14번은 위에 언급한 멜로디아 음반, 그리고 23번은 리히터의 것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에 있어서도 길렐스의 것을 음반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5번 황제는 길렐스가 서방세계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숱하게 연주한 그의 장기이다. 레오폴드 루드윅, 조지 셀, 칼 뵘, 귄터 반트 등 서방세계의 전설적인 지휘자들과 협연하였는데 모두가 최고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명반들이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음반이라면 조지 셀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함께 협연한 피아노 협주곡 전곡 음반을 들 수 있겠으나 1957년 레오폴드 루드윅과 함께 한 음반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명반이다. 개인적으로 1957년의 음반이 더 화끈하고 맘에 든다.
베토벤을 넘어 브람스의 음악에서도 길렐스의 우수성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을 좋아하는 팬들이라면 모두가 소장하고 있거나 한 번 이상은 보았을 법한 대표적인 명반이 있는데 길렐스와 베를린 필의 오이겐 요훔이 함께 한 음반이다.
이 음반에 수록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2번은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최고의 명반 중의 하나로 꼽힌다. 특히 1번은 클리포드 커즌-조지 셀의 음반과 더불어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데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그래도 오이겐 요훔이 이끄는 베를린 필의 반주가 약하고 처지는 느낌이 있지만 그래도 길렐스의 음반이 가장 낫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음반에 수록된 7개의 환상곡 역시 무척 뛰어난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역시 길렐스를 빼놓을 수 없다. 길렐스는 이 곡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스페셜리스트 중의 한 사람인데 서방세계에 진출하기 전부터 소련에서 많은 연주를 하였고 그가 1955년에 처음으로 미국에 연주여행을 갔을 때 연주한 곡이 바로 이 곡이었다. 또한 차이코프스키 콩쿨의 심사위원을 맡았을 정도로 그는 이 곡에 도가 튼 사람이었다. 몇몇 음반들이 있지만 가장 구하기 쉽고 대표적인 명반을 하나만 꼽는다면 로린 마젤과 함께 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전곡이 수록된 음반이 있다. 보통 이 곡을 이야기할 때 역사적 명반으로 꼽는 것이 3-4 종류가 있는데 호로비츠, 리히터, 길렐스, 아르헤리치의 것이다. 이 중에서 모든 것을 종합하여 딱, 딱 하나만 꼽아서 추천한다면 바로 길렐스의 음반을 꼽고 싶다.
난 피아노 곡을 들을 때 언제나 길렐스와 리히터의 음반을 먼저 듣는 것이 하나의 습관처럼 되어 있다. 대단히 남성적이고 힘이 넘치는 큰 스케일의 피아노. 하지만 그 안에서 우러나오는 진한 서정성과 우아한 아름다움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피아노 곡을 좋아하는 내겐 하나의 곡을 들을 때 여러 연주자의 다양한 연주를 듣지만 다른 여러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다 듣고 난 뒤에 결국 다시 찾게 되는 것은 길렐스와 리히터의 연주이며 그 중에서도 길렐스를 찾는다. 내게 에밀 길렐스란 이름은 그런 의미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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