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정민호 기자]
▲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겉그림. | |
ⓒ2006 웅진지식하우스 |
그런데 이것보다 더 황당한 것은 여자가 책을 읽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였다. 책을 읽으면 갖가지 병에 걸릴 수도 있으며 심지어 여자로서의 기능을 잃을 수 있다는 소리까지 나왔다. 더군다나 이러한 주장들이 그 시대에 '진보적'이라고 평가받던 계몽주의자들로부터 나온 것이니 대다수의 사람들이 책 읽는 여자를 어떻게 봤을지는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렇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의 제목처럼 '위험한' 여자로 봤다.
그럼에도 여자들은 책을 읽었다. 책에 삽입된 많은 그림들에서 알 수 있듯이 여자들은 읽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아내들은 남편이 성화할 것을 알기에 혼자만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침실에서 책을 보았고, 하녀들은 해야 할 일도 미룬 채 주인의 것을 몰래 보았다. 급박한 순간이 찾아올 수 있음에도 그녀들은 책 읽기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그랬던 것일까?
당시 유럽은 철저한 엘리트 사회였다. 그 시절의 엘리트란 누구인가? 읽고, 쓸 줄 아는 소수의 남성들이었다. 소수의 남성들은 남성을 위한 이데올로기를 만든다. 성경을 해석할 수 있었던 소수의 종교인들이 자신들만의 패러다임을 만들었고 그것을 강요했듯이 엘리트들도 여자들을 이류로 만드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한 것이다.
사회는 저항하지 않고 이것을 따른다. 특히 여자들이 그랬다. 그런데 여자들이 글을 읽게 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문제란 무엇일까? 여자들이 똑똑해지는 것이다. 또한 자신만의 생각을 갖게 되고 현실을 뛰어넘는 상상력을 갖게 된 것이다. '책 읽는 여자'는 책을 만남으로써 '자신의 것'을 구축할 수 있게 된다.
엘리트들은 진시황제처럼 '분서갱유'라도 한번 일으키고 싶었겠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는 터, 구차한 논리만 늘어놓는다. 하지만 손가락으로 거대한 물결을 어찌 막겠는가. 여자들은 어떻게든지 책 읽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녀들은 그걸 포기한다는 것이 자신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다는 걸 알고 있었다. 즉, 그것을 자신과 동일화하고 있었기에 그들의 소리로부터 귀를 막는다.
결국 엘리트들의 우려처럼 여자들은 결국 위험해진다. 책을 읽는 그녀들이 세상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들은 직접 '쓰기'까지 했다. 받아들이고 소화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창조하는 것까지 이룩한 것이다. 이것을 고려해본다면 엘리트들의 우려는 맞았다. 하지만 그것은 '고루한' 그들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반대의 입장, 특히 여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 책 읽는 여자는 '매혹적'이지 않았을까? 고흐나 미켈란젤로, 베르메르, 마티스 등의 거장들이 위험한 여자들을 그린 걸 보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나의 주제를 놓고 13세기부터 21세기의 다양한 그림들을 볼 수 있다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는 충분한 만족감을 준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즐거움은 주제가 주제인 만큼 이 책이 여성 해방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책 읽는 여자는 분명 페미니스트의 원조라고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또한 미시적인 관점으로 중세 시대를 엿볼 수 있는 재미가 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책은 그림에 등장한 도구들의 의미까지 헤아리는데 주력하고 있는데 그 도구들은 소소한 것일지언정 시대를 이해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것을 위해 준비한 역자들의 글까지 합한다면 그 시대에 대한 지식을 짭짤하게 얻을 수 있다.
여자가 읽는 것을 배웠을 때 세상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문학책을 읽은 여자들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책 읽는 여자'의 그림이 아름답게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슈테판 볼만의 손을 잡고 떠나보자. 그림들을 하나하나씩 살피며 돌아다니면 알 수 있으리라. 마력으로 뭉친 독서의 힘과 그것을 껴안은 여자들의 매혹적인 비밀을.
2006-02-28 12:06 |
ⓒ 2006 OhmyNew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