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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제206회]
우리들의 갈길
아버님께
아버님 하서와 {민요기행} 진작 받았습니다만 차일피일 접견 기다리느라 답상서가 너무 늦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을 비롯하여 가내 두루 평안하실 줄 믿습니다. 이곳의 저희들도 일찌감치 내의를 찾아 입고 동복으로 갈아입는 등 겨울이 유난히 빨리 찾아오는 교도소의 계절에 맞추어 채비하고 있습니다.
나무들도 잎을 떨어 뿌리를 쉬게 하고 짐승과 미물들도 땅 속을 찾아들어가 동면하는 자연의 이치를 본받아서 저희들도 추운 겨울 동안에는 수고롭게 무엇을 이룩하려 하기보다는 한 해 동안의 대소사를 마무리함으로써 이듬해 봄을 예비하는 쪽을 택하고자 합니다. 우송해주신 {민요기행}은 갇혀 있는 사람의 잠들어 있는 역마살을 깨워놓기에 충분합니다. '민요를 따라가는 일은 곧 건강하게 살아 숨쉬는 민중적 삶의 현장을 찾는 일'임을 공감케 하며 역사의 구비구비를 굽이돌아 면면히 흘러온 민중들의 삶과 그 삶의 언저리에 꽃핀 인정 풍물을 찾아나선 저자 일행의 발길은 흡사 우리 시대의 정신이 지향해야 할 바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듯 느껴집니다.
특히 발길 닿는 곳곳마다에서 좋은 사람을 만날 줄 알고, 목격하는 이러저러한 현실에서 그 숨은 뜻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그리고 일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가장 무겁게 받아들이는 저자의 따뜻한 심성과 날카로운 형안(炯眼)과 그리고 몸에 밴 민중적 자세가 이 책의 튼튼한 뼈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뼈대가 속에 있음으로 해서 '기행'이란, 땀내 나는 삶의 임자로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삶의 거죽을 일별하는 구경꾼일 뿐이라는 결정적인 한계를 시원하게 뛰어넘게 하고 있습니다.
민요가 민중들의 삶의 현장을 보여주듯, 강물이 바다를 보여주듯. 교도소 뒷산 허리를 넘어가는 길은 그 끝에 닿아 있을 사람들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향하여 갈길을 묻습니다.
1985. 11. 14.
- 신영복의 '한 포기 키 작은 풀로 서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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