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세미오름에 갔다가 입구에서 바로 이 녀석들을 만났다. 그곳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아직도 다 시들어버리지 않고 남아 있는 줄은 몰랐다.
비록 싱싱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 건진 것은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새 집으로 이사를 갔는데, 집 앞에 오래된 기와집
도가(都家)가 있어 그 마당 구석에 이 꽈리가 쭈르르 몰려 있었다. 우리는 그 마당과
집에서 놀면서 이 열매를 따서 구슬처럼 갖고 놀았다. 속엣것을 하늘 안 보이고 먹으면
맛있다고 해서 집안에 가지고 와서 먹었으나 너무 썼다. 땅꽈리는 고소한데….
꽈리는 쌍떡잎식물 통화식물목 가지과의 다년생초로 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키는 40~90㎝로 자란다. 가장자리가 깊게 갈라진 잎이 어긋나거나
한 군데에 2장씩 모여 달리기도 한다. 꽃은 6~7월에 노란빛을 띤 하얀색으로
1송이씩 잎겨드랑이에서 핀다. 열매는 둥그런 장과(漿果)로서 붉게 익는다.
꽃받침이 커지면서 붉은 빛을 띠며 열매를 완전히 감싼다. 이 열매를 꽈리라고
하는데, 아이들이 열매 안에 들어 있는 씨를 모두 끄집어낸 다음 입 안에 넣고
씹거나 부는 노리갯감으로 쓰기도 했다. 전체를 말린 것을 산장(酸漿)이라고 하며
한방에서는 이뇨·해열제로 쓰고 상처가 났을 때 통째로 다져 환부에 바르기도 한다.
♧ 별이 된 풀꽃 - 김학산
하늘 금 땅 금 긋던 인간들이 비지땀으로 빚은 술잔을 기울이며, 꽈리처럼 쉽게 터져버리는 희망을 노래하다 지쳐 잠이 든 다음에야, 대지 위엔 황홀한 어둠이 하나 둘 깃을 내립니다 천년 청동의 빛깔로
그런데, 누구일까 보이지 않는 작은 손길 하나 있어, 우주의 우물에서 빛의 두레박질이 한창입니다 바늘 눈을 가진 가녀린 풀꽃 입니다, 마른 어둠을 숨어 사르며 행간의 작은 물방울로 항상 더운 피 끓이는 꿈 덩어리입니다
자작나무 가지 끝 눈먼 새끼 새의 둥지는 바람의 작은 거룻배인가, 비상하지 못하는 창문 안쪽으로 한사코 흔들리는데, 칠흑 대지 위엔 어느 듯 향기 가득한 뭇별들의 문안 인사 입니다
선생님! 보십시오 속살이 환히 드러나는 들판 가득 뭇별들이 무량대수로 돋아나고 있습니다 파랗게, 빨갛게, 노랗게…. 오늘 밤은 별이 떨어지고 새로 돋아나는 언덕에서 한 생애를 다 살았습니다
♧ 바람만 불어도 - 이향아
나는 아무래도 메말랐나 보다
바람만 불어도 버스럭거린다
버스럭거리다가 혼자 찢어지고
찢어지다가 혼자 사무치는
나는 그래도 축축한 편인가 보다
바람만 불어도 눈앞 보얗게 젖어
울음 참아 꽈리처럼 목젖이 부어
버스럭거리든지
가라앉든지
나는 아무래도 변덕스러운가 보다
바람만 불어도 이렇게 무너지는
바람만 불어도 가슴이 미어지는
날마다 무슨 바람이든 불지 않는 날이 없고
나는 무슨 핑계로든 후회 없는 날이 없다
♧ 꽈리 - 허정자
나 어릴 적
집 뒤안 장독대에
어머님이 심으신 꽈리가 생각난다
지금쯤 익어서
빨간색 주홍색 푸른색의
색깔로 대롱대롱 달려있는 꽈리를...
꽈리 속에
잘디잔 씨알처럼
내 가슴에 가득 찬 예기들을
후련히 쏟아 내며 꽈리를 불고 싶다
뽀드득 뽀드득
가을바람에 소리 실려
어머님께 전할까 싶다
어머님도
세월이 이렇게 이렇게
흘러가든가 하고 물어보려고….
♧ 순이는 왜 꽈리를 부는가 - 최범영
개구리가 밤낮 왜 울지? 논둑에 엎드려 개굴개굴 하루를 보냈다. 개구리는 우는 게 아니고 꽈드득꽈드득 꽈리를 불었다. 하루 종일이라도 꽈리 부는 순이에게 꽈리를 빌렸다. 사람 발자국 소리에 조용조용 살피던 개구리들, 다시 나와 함께 꽈리소리로 들판을 채웠다. 짝을 찾기 위해 개구리가 운다고 했다. 말대로라면 개구리는 입도 필요 없다, 꽈리도 필요 없다, 멋지게 한판 붙고 스러지는 하루살이이면 될 터. 개구리는 이른 봄에 짝짓기하고 여름 내내 밤낮 노래 잔치한다. 살아있기에 꽈드득꽈드득, 얼씨구 그들이 사는 방식일 뿐이었다. 맹꽁이에게 맹~ 하니 꽁~하고 답한다. 순이는 꽈리, 나는 맹꽁이, 맴맴 엉덩이를 움찔움찔, 누렇게 익는 벼 배미 따라 절로 나는 춤, 계절은 스실스실 나름의 곡조를 탄다. 어느새 뜬 달도 노래 토리 맞춰 구름과 춤을 춘다.
♧ 신동엽 생가 - 김영천
역사의 갈피를 열듯 닫혀진 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서자 민중들의 가슴처럼 피멍 든 자목련 몇 송이가 피어서는 껍데기는 가라. 낭랑한 선생의 목소리로 외친다 아내가 지아비를 기리며 쓴 시가 편액으로 걸린 안방문을 기어코 열어보거나 장꽝으로 헛간으로 선생의 체취를 느끼려 찾아다니지만 주인 없는 뜨락으론 풋감만 몇 개 투두둑 진다 이렇게 스쳐가는 후학들이야 지고지순한 선생의 마음은 차마 엿보지도 못하고 꽈리같은 열매를 매단 이름 모를 나무에나 외려 관심을 둔다. 껍데기는 가라. 그의 육필 원고가 각인된 액자 속의 글자들처럼 우리는 조금씩 가까이 서거나 멀찍이 서서도 함께 어울려 한 편의 멋드러진 詩가 되고자 하는 것일까 우루루 모여 사진을 찍는데 이별을 예감이나 하는 듯 문득 빗방울이 떨어진다 다시 한 번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닫고 서둘러 차에 오르는 그대들은 모두 순하디 순한 민중들처럼 조금씩 관음의 미소를 띤 채 승차권 대신 능소화 꽃잎 한 장씩을 낸다
껍데기는 가라.
♬ 가을을 노래한 가곡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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