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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아광지(農兒壙志)

ㄹl브ㄱL 2008. 11. 6. 01:31

글을 깨친 정약용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낫놓고 기역자조차 알 길이 없었던 백성들은

이렇게 글로나마 시름을 덜 수도 없었으니 그 속이 어땠겠는가.

農兒壙志는 농아의 무덤에 바치는 마음이라는 뜻

 

농아광지(農兒壙志)

정약용

 

농아(農兒)는 곡산에서 잉태하였으며 기미년(1799) 12월 초이튿날 태어나 임술년(1802) 11월 30일에 죽었으니 발진이 나서 마마가 되더니 마마가 헐었기 때문이다. 내가 강진에 귀양 살고 있는 중이어서 글을 지어 그 애 형에게 울면서 무덤에다 읽어주게 하였다. 농아의 죽음에 부치는 글에 이르기를, 네가 세상에 태어나 세상에서 떠나간 기간은 겨우 세 돌일 뿐인데 나와 이별해 산 기간은 그 중에서 두 돌이나 되었다. 사람이 60년 동안 세상에 살면서 40년 동안이나 그 아버지와 이별한 채 살았던 셈이니 정말 애달픈 일이로다. 네가 태어날 때 나는 깊은 근심을 하고 있을 때여서 너의 이름을 농(農)이라고 했는데 이미 고향집에 돌아와 있을 때라 너를 살게끔 하는 일은 농사뿐일 거고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죽는 것보다야 현명한 일이어서이다. 그래야만 내가 죽더라도 흔연스럽게 황천고개를 넘어갈 수 있고 한강을 건너갈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이렇게 보면 나의 죽음은 사는 것보다 현명할 수도 있었다. 나의 죽음은 사는 것보다 현명한 일인데도 살아 있고 너의 살아 있음은 죽는 일보다 현명한 일이었지만 죽어버렸으니 나의 능력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나 보다. 내가 네 곁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꼭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너의 어머니가 보내 편지에서 너는 "아버지가 나에게 돌아와 주셔도 발진이 나고 아버지가 돌아와 주셔도 마마에 걸릴까"라고 했다 하니 네가 무얼 헤아리는 바가 있어서 그러한 말을 했겠냐만 그러나 너는 내가 네 곁에 돌아가면 의지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한 말을 했을 것 같으니 너의 소원을 이루지 못한 게 참으로 슬픈 일이 되고 말았구나.

 

신유년(1801) 겨울에 과천의 주막에서 너의 어머니가 너를 안고 나를 송별해 줄 때 너의 어머니가 나를 가리키면서 "저분이 너의 아버지다"라고 하니 너도 따라서 나를 가리키면서 "저분이 우리 아버지다"라고 하였으니 아버지가 어떻게 해서 아버지라는 것도 너는 실제로 알지 못하고 하던 소리였으니 그것도 슬픔을 자아내게 하던 일이었다. 이웃 사람이 가는 편에 소라껍데기 두 개를 너에게 전해 주도록 했는데, 너의 어머니 편지에 너는 강진 사람이 올 때마다 소라껍데기를 찾다 못 찾으면 마음이 몹시 섭섭해하였다고 하는데 네가 죽고 나서야 소라껍데기가 다시 오고 보니 슬프기 한량없구나. 너의 얼굴 모습은 빼어나고 깎은 듯 하였고 코의 왼쪽에 조그만 점이 있었다. 네가 웃을 때에는 양쪽 송곳니가 유난히도 툭 튀어나오곤 했었다. 슬픈지고! 나는 오직 너의 모습이나 생각하며 잊지 않으며 네가 아비 생각하던 정에 보답해주마.

 

복암(茯菴) 이기양(李基讓) 어른께서 항상 말하기를 "자녀 중에 요절한 애들은 당연히 그 애들의 생년월일과 이름·생김새 및 죽은 해의 날짜를 적어 두어 뒷날 증거가 될 수 있게 하고 그 애들이 태어난 흔적이 남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 말씀이야말로 참으로 어지신 말씀이었다. 나는 경자년(1780) 가을 예천 군청의 관사에서 낙태를 한 때로부터 시작하여 신축년(1781) 7월 아내가 애를 밴 채 학질을 앓다가 팔삭동이 딸 하나를 낳아 4일 만에 죽었는데 이름도 짓지 못한 채 와서(瓦署)의 언덕배기에다 묻었고, 그 다음은 무장(큰아들 學淵)과 문장(둘째아들 學游)을 낳아 다행히 키워냈고 그 다음에는 구장(懼牂), 그 다음에는 딸아이 효순(孝順)인데 순산으로 효도했다 하여 효순이라 했다. 이 애들 둘은 모두 요절했지만 구와 순이는 모두 간단한 묘비명을 지었는데 실제로 묘에 묻은 비명이 아니라 책에다 기록해 둔 비명이었다. 그 아래로 딸 하나를 낳아 지금 열 살로 두 차례의 역질을 이미 다 마쳤으니 겨우 죽음을 면했나 보다. 그 다음은 삼동(三同)이란 놈인데 마마에 걸려 곡산에서 죽었다. 이 애가 죽을 때에는 아내가 애를 배고 있는 때여서 슬픔을 참고 애를 낳았는데 열흘을 겨우 넘겨 또 마마에 걸려서 며칠이 못되어 죽어버렸다. 그 아래가 바로 농장(農牂,즉 農兒)이다. 삼동이는 병신년(1796) 11월 초닷샛날 태어나 무오년(1798) 9월 초나흗날 죽었다. 삼동이 다음 애는 이름도 짓지 못했고 구장이와 효순이는 두척(斗尺)의 산등성이에다 묻었고 삼동이와 다 다음애는 두척의 산발치에다 묻었다. 농아도 필연코 산발치에 묻었을 거다.

 

모두 6남 3녀를 낳아 살아남은 애는 2남 1녀뿐으로 죽은 애들이 4남 2녀나 되어 죽은 애들이 살아난 애들의 두 배나 된다. 오호라! 내가 하늘에서 죄를 얻어 이처럼 잔혹스러우니 어쩐 일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