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lassic♬/클래식~♬

한동안 듣지 않았던 아이슬러의 음악을 다시 들으며.

ㄹl브ㄱL 2014. 11. 15. 18:20



— 한동안 듣지 않았던 한스 아이슬러Hanns Eisler의 음악을 얼마 전부터 조금씩 듣고는 한다. 그러면서 동서독 통일 이전의 동독에서 활동했던 클래식음악 작곡가들의 음악도 아이슬러의 음악과 함께 듣는다. 파울 데사우Paul Dessau, 지크프리트 마트후스Siegfried Matthus, 만프레트 바이스Manfred Weiss, 프리츠 가이슬러Fritz Geissler, 만프레트 슈베르트Manfred Schubert 그리고 다른 몇 명의 작곡가들의 음악을 말이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에게 작곡을 배운 후의 아이슬러의 음악 인생은, 바이마르시기와 망명시기 그리고 동독시기라는 3개의 시간대로 구분할 수 있기에 그의 음악을 굳이 동독에서 활동했던 작곡가들로 한정해서 함께 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다분히 즉흥적인 감정을 가지고 아이슬러의 음악과 동독에서 활동했던 작곡가들의 음악을 함께 듣고는 하는데,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음악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음악도 있지만 그들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마음이 생긴다. 왜냐하면 클래식음악사에서는 동시대 서독을 포함하는 서유럽 국가들에서 활동한 작곡가들과 함께 현대클래식음악 작곡가로 분류된다 하더라도 동독에서 활동했던 클래식음악 작곡가들의 음악 앨범과 음원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고 동서독 통일 이후에도 활발하게 나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음악을 녹음해서 유통시킬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감안해야 하겠지만). 아이슬러를 제외하면 동독에서 활동했던 다른 작곡가들의 음악을 단독으로 다루는 앨범과 음원이 많지 않은데, 그런 이유로 베를린 클래식스Berlin Classics에서 CD 5장으로 구성된 모음집으로 나온 [동독의 교향곡Sinfonik in der DDR](2006)은 나에게 의미 있는 앨범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게다가 이 앨범에 담긴 음악을 지휘한 지휘자들은 쿠르트 마주어Kurt Masur, 헤르베르트 케겔Herbert Kegel, 쿠르트 잔데를링Kurt Sanderling, 바츨라프 노이만Václav Neumann 그리고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Herbert Blomstedt 같은 뛰어난 음악가들이기도 하다).


음악을 들으면서, 동독에서 삶을 보냈던 클래식음악 작곡가들의 음악을 녹음한 앨범과 음원이 더욱 다양하게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대클래식음악 자체가 그 이전 시대 음악들에 비하면 연주도 적게 되는 편이고 그만큼 앨범과 음원도 적은 편이어서 서유럽에서 활동했다 하더라도 작곡가의 지명도에 따라 녹음과 발매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동독에서 활동했던 작곡가들의 음악은 앨범이든 음원이든 구해서 듣기가 상대적으로 더 어려운 것 같다. 아이슬러라는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음악도 동독 시절에 남아있던 녹음을 발굴해서 (주로) 베를린 클래식스에서 나온 앨범들을 제외하면 동서독 통일 이후에 새로 나온 앨범과 음원들이 나에게는 부족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에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Matthias Goerne가 아이슬러의 [엄숙한 노래Ernste Gesänge](harmonia mundi, 2013)를 녹음하여 앨범으로 낸 것을 나는 정말로 기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괴르네는, 아이슬러가 나치를 피해 미국에 있던 시기에 작곡한 노래 모음집인 [헐리우드 노래집The Hollywood Songbook](DECCA, 1998)에서 이미 뛰어난 노래를 들려주었으며(이 앨범은 아이슬러와 에른스트 부쉬Ernst Busch가 남긴 역사적인 녹음과 함께 나를 아이슬러의 노래로 인도해준 앨범이다), 아이슬러가 아닌 다른 작곡가들의 음악들 이를테면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Nikoulaus Harnoncourt와 빈 콘첸투스 무지쿠스Concentus Musicus Wien와 함께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마태 수난곡Matthäus-Passion](Teldec, 2001)과 2008년에 1집이 나온 이후로 현재까지 8집이 나온 [슈베르트 에디션Schubert Edition](harmonia mundi) 등에서도 아름답고 품격 있는 노래를 들려준 바 있는데, 아이슬러의 [엄숙한 노래]에서도 역시 잊기 힘든 노래를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 내가 아이슬러의 음악을 처음으로 들었을 때는 대학을 이제 막 졸업했을 무렵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이전에 아이슬러의 존재를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그 당시에 아이슬러에 관한 나의 지식은, 쇤베르크에게 파문당한 제자여서 안톤 베베른Anton Webern과 알반 베르크Alban Berg와는 나란히 놓일 수 없는 작곡가, 라는 왜곡되고 단편적인 것이어서 사실상 아이슬러를 몰랐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었다. 말하자면 그 당시의 나에게 아이슬러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의 음악가였던 셈인데, 그의 음악에 접근하기 쉽지 않았던 그럴만한 이유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돌이켜보면 어이가 없는 부분이 있기도 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아이슬러는 베베른과 베르크와 함께 쇤베르크가 자신의 가장 뛰어난 제자로 인정할 정도로 음악적인 능력이 뛰어났고 아이슬러와 쇤베르크가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음악적인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음악과 정치를 연결해서 개념화했던 서로의 입장에서 연유했던 것이기에, 어떻게 아이슬러를 그저 쇤베르크에게 파문당한 제자 정도로 알고 있었는지 신기한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아이슬러의 음악을 들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던 것도 아이슬러라는 존재 자체에 관한 관심보다는, [영화를 위한 작곡Composing for the Films](Continuum, 2006)을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와 함께 썼다거나,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d Brecht의 교육극Lehrstück [조처Die Maßnahme](한국브레히트학회 엮음, [브레히트 선집 1권: 희곡](연극과 인간, 2011))에 필요한 음악 작업을 했다거나, 아우슈비츠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인 알랭 레네Alain Resnais의 [밤과 안개Nuit et Brouillard](1955)의 음악을 작곡했다는, 다시 말해 내가 관심을 갖고 있던 다른 사상가와 예술가의 곁에 그가 있었다는 이유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 이후에도 아이슬러의 음악을 그리 많이 들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아이슬러에 관한 단편적이고 왜곡된 지식만 있었던 때를 떠올려보면 나름대로 나아진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쇤베르크와 베르크 그리고 베베른 등의 음악을 듣는 것에 비하면 여전히 접촉의 빈도가 낮다. 그러나 아이슬러의 음악을 들은 이후로 그를 향한 관심을 완전하게 놓아본 적은 없다. 애초에 나처럼 음악적으로 평범한 역량의 소유자가 아이슬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더 중요하게는 작곡가 아이슬러라는 한 사람의 존재와 그의 음악을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아이슬러를 향한 존경심이 점점 깊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에 깊이 공감했던 아이슬러는 [레닌 레퀴엠Lenin Requiem](1935)이라는 그가 작곡한 음악의 제목에서도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지배자의 억압에 저항하려는 작곡가의 의지가 담겨 있는 음악들을 적지 않게 남겨 놓았다. 아이슬러에게 음악은 세상과 완전하게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음악이 세상의 변화에 도움이 되어야하는 것이었기에 음악과 정치(이것은 예술과 정치 또는 미학과 정치로 바꾸어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는 분리해서 다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논의되는 것이어야 하며 더 나아가 최상의 수준에서 결합될 수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슬러는, 아이슬러가 남긴 글이나 알브레히트 베츠Albrecht Betz와 같은 아이슬러 연구자/비평가들의 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음악관을 추상적으로 주장하는 선에서 머무르지 않고 역사와 현실을 면밀하게 살피면서 자신이 속해있는 시대에 필요한 음악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관한 고민을 죽을 때까지 놓지 않았다. 이를테면 바이마르시기에 아이슬러가 내놓은 이른바 예술 음악의 위기에 관한 분석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역사적으로는 중세 봉건체제에서 필요로 했던 음악과 근대 시민사회에서 필요로 했던 음악이 어떤 역사적인 요구와 맞물려 있던 것인지를 살펴보고, 현실적으로는 당대에 나타나기 시작한 음악 산업적인 측면과 1930년대의 경제적인 위기를 포함하는 사회적인 측면이라는 현실을 모두 아우르면서 자신이 속해 있는 현재에 필요한 음악이 무엇인지에 관한 고민을 계속해서 밀고나갔던 것이다.


음악을 논의하는 데 있어 역사와 현실을 살펴보는 작업을 필요로 했던 것은 자신이 작곡한 음악이 세상의 국면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아이슬러가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슬러는 무조주의적인 작곡기법과 12음기법이 당대 클래식음악계가 도달한 최고 수준의 작곡 기법이라고 해서 오로지 그러한 기법만을 고수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는데, 쇤베르크가 인정할 정도로 작곡 능력이 탁월했던 그가 바이마르시기에 노동자들의 회합과 투쟁을 위해 작곡한 음악들의 경우에는 현대적인 작곡 양식을 접어두고 교회선법을 이용하여 작곡을 하지만(브레히트는 이 시기의 아이슬러의 음악을 두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 바 있다. "스승의 과도한 수학적인 음악에는 몇몇 동료 전문가들만이 접근할 수 있지만 제자는 대중들에게 눈을 돌렸다. 몇몇 전문가만이 쇤베르크의 작품을 연주할 수 있지만 수백만의 대중은 아이슬러의 노래를 부른다."), 나치의 압박으로 독일의 바깥에서 생활해야 했던 망명시기에는 오히려 (변형된) 12음기법으로 작곡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나치는 12음기법을 퇴폐적인 예술기법으로 비판했지만 아이슬러에게 12음기법은 나치를 향한 일종의 음악적 비판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양식으로 작곡하든 음악은 세상의 변화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아이슬러에게 자기 시대에 필요한 음악이란 듣는 이로 하여금 자신이 속해있는 현실이 어떤 상태인가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것, 다시 말해 만일 음악을 듣고 있는 현실이 억압적이라면 그러한 현실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음악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갖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슬러는 기존의 음악적인 형식과 음악이 향유되는 방식을 모두 문제 삼았다. 아이슬러에게 음악은 사람을 도취하게 만들어서 (비판적인) 사유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세계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사유에 힘을 불어넣어주는 것이어야 했기에 19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음악 양식들인 교향곡과 오페라와 같은 대규모 오케스트라 음악들이 청중들의 흥분과 열광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사용되는 것을 맹렬하게 비판했다. 그래서 아이슬러는, 아도르도와 함께 쓴 [영화를 위한 작곡]를 포함하는 여러 글들에서 보여주었으며 또한 레네의 [밤과 안개]의 음악을 포함하는 여러 음악들에서 들려준 것처럼, 기존의 음악에서 청중들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감정의 고양을 이끌어냈던 선율과 화성을 억제하거나 흩뜨려 놓거나 무화시켜버리고는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이슬러가 정치에 매몰되어 미학적으로 살펴볼 가치가 없는 지루한 음악을 만들었다거나 고도의 음악적인 능력을 갖추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은 접근이 불가능한 골치 아픈 음악만을 만들었다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세상의 변화에 도움이 되는 음악이 어떻게 가능할까를 고민했던 아이슬러에게 청중은, 고도의 음악적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 평범한 노동자들을 포함하는 것이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노동자들이 그의 음악을 듣는 것이 더 중요했을 것임을 생각해본다면,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세계가 가능할 것이라 믿었던 작곡가 아이슬러가 그러한 희망을 노동자들과 나누고자 할 때 자신의 음악을 노동자들이 이해할 수 없게 작곡한다는 것은 그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슬러에게는 현대 음악이 들려준 미학적인 수준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작곡된 음악이 어느 정도 수준이상으로 음악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비용을 들일 수 없는 노동자들과 어떻게 접속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매우 중요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아이슬러의 음악관이 과연 성공적으로 결실을 맺었는지에 관해 지금의 나로서는 확실하게 말하기 어렵지만 약간의 의문은 제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의문을 충실하게 제기하려면 아이슬러와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 그리고 에른스트 크셰넥Ernst Křenek의 '실용음악Gebrauchsmusik'을 포함하는 여러 음악적인 논의들을 짚고 넘어가야 하지만 여기서는 그러지를 못했다). 단순하게는, 아이슬러의 [연대의 노래Das Solidaritätslied](1929) 같은 노래처럼 그의 음악에는 독일어를 발음대로 읽을 수만 있다면 고도의 음악적인 배경이 없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따라 부를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독일교향곡Deutsche Sinfonie](1935~1957)처럼 12음 기법을 이용하여 작곡한 음악들의 경우는 그가 쇤베르크의 12음 기법 음악과는 다르게 협화음적인 요소도 있으며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가사를 포함하는 여러 가지 음악적인 장치들로 (나치를 향한) 비판과 (음악들 듣는 청중들의) 이해를 동시에 성취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독일교향곡]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화성학을 포함하는 (일정 수준 이상의) 음악(사)학적인 지식이 어쩔 수 없이 필요해지는 것은 아닌가, 라는 의문을 가져볼 수 있을 것이다. 당대의 사람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는 선율을 차용했더라도, 아이슬러의 12기법 음악은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다른 방향으로 적용시킨 음악이다, 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이미 음악(사)학적인 지식이 요구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여기에 더하여 오늘날의 관점에서 조금 더 복합적으로 들여다본다면 아이슬러의 음악관에 관한 몇 개의 의문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와 2차 세계대전 이전이라는 시기의 바이마르라는 시공간에서 성립된 그의 음악관이 가지게 되는 역사적인 한계와 연관된 의문, 예술의 위치는 체계에 매몰된 노동자들의 의식을 깨워 일으킬 수 있는 계몽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일종의 고전적 이데올로기적인 문제 설정으로 볼 수 있을 그의 음악관에 관한 의문 그리고 예술의 역할에 관한 회의적인 입장으로 "고백하자면, 저는 항상 유토피아적인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습니다. 유토피아주의는 1그램도 없어요. (……) 저는 그 유토피아적인 요소가 제임슨Fredric Jameson 이론의 가장 취약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으며 [공포의 변증법Signs Taken for Wanders](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4)이라는 초기 저작에서부터 '문학은 해방적 효용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타협의 산물'이라고 일관되게 말해온 프랑코 모레티Franco Moretti의 논의를 빌려 과연 음악을 포함하는 예술이 이데올로기를 돌파해 낼 수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아이슬러의 음악관을 향해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아이슬러와 그의 음악에 의문을 가져보는 것은, 그와 그의 음악이 더 이상 나에게 자극이 되지 않는 지나간 유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역사적이면서도 현재적인 작곡가와 음악으로 나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예술과 세계의 관계를 생각하는 데 있어 아이슬러와 그의 음악은 적어도 나에게는 무시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대상이다.


— 아이슬러의 음악을 다시 들으면서 다른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이 떠오르고는 했다. 그러니까, '반反 파시스트 칸타타'라는 부제가 붙어있으며 나치와 히틀러의 몰락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작곡된 아이슬러의 [독일교향곡]과 같은 작품은, 예술과 세상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해온 다른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을 나로 하여금 떠올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안나 제거스Anna Seghers의 [제7의 십자가Das siebte Kreuz](김숙희 옮김, 시공사, 2013)와 같은 소설들, 장-뤽 고다르Jean-Luc Godard의 [영화의 역사(들)Histoire(s) du cinéma](1988~1997)과 [아워 뮤직Notre Musique](2004)과 같은 영화들 그리고 루이지 노노Luigi Nono의 [중단된/계속된 노래Il Canto Sospeso](1955~1956)와 한스 베르너 헨체Hans Werner Henze의 [교향곡 9번Sinfonia No. 9](1995~1997) 그리고 하이너 괴벨스Heiner Goebbels의 [아이슬러마테리알Eislermaterial](1998) 같은 음악들. 그러나 아이슬러와 그의 음악을 매개로 다른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생각할 때에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인물은 결국 브레히트일 것이다.


아이슬러는 브레히트의 연극에서 사용될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지만 브레히트의 작품은 아이슬러의 음악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준 중요한 재료가 되기도 했다(이것은 브레히트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연극에서 음악이 갖고 있는 기능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브레히트에게 아이슬러와의 만남은 소중한 인연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관계가 바이마르시기부터 동독시기로까지 이어지는 (망명시기에 소원했던 적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정치적 동지의 관계였기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닌데 왜냐하면 아이슬러에게 브레히트의 시는 음악적인 의미에서도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아이슬러는 음악을 작곡하는 데 있어 성악의 기능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작곡가였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아이슬러에게 음악은 듣는 사람들이 도취된 상태로 있게 하는 것이 아닌 비판적인 의식을 갖는데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의도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기악을 활용하여 작곡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아이슬러는 가사를 통해서 비판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성악의 기능에 주목하게 되는데 이러한 자신의 음악에 사용할 가사로 그가 가장 많이 의지했던 작가가 바로 브레히트였던 것이다. 물론 아이슬러가 브레히트의 작품만을 자신의 음악에 가사로 사용한 것은 아니어서 [엄숙한 노래](1962)처럼 프리드리히 횔덜린Johann Christian Friedrich Hölderlin의 시(를 포함하는 여러 시인들의 시)를 가사로 사용해서 만든 노래도 존재한다. 그러나 아이슬러가 곡을 붙인 브레히트의 작품은 무려 200편이 넘어서 [연대의 노래]와 같은 '노동(자) 노래Arbeiterlied'는 물론이거니와 [독일교향곡]과 같은 교향곡에 이르기까지 브레히트의 흔적은 아이슬러의 작품 전반에 걸쳐있다. 아마도 그래서이겠지만 아이슬러는 다른 누구보다도 브레히트와 함께 있는 모습이 나에게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두 명의 예술가가 함께 담긴 아래 보이는 사진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