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자유·섹스 등 이미지 내포… 소비층 확산 고가 수입시장 급성장
강남이나 압구정 또는 대학가 등 젊은이들이 오가는 거리에 나서 보자. 아니, 기업체 빌딩이 밀집한 공간의 평일 풍경만 아니라면 오가는 사람 셋 중 하나는 청바지 차림이다. 남녀를 따질 것도 없다. 더 이상 젊은이들의 전유물도 아니다. 요즘엔 40대 이후 중년 남성도 주말엔 청바지를 애용한다.
청바지에 대한 현대인의 사랑은 통계수치로도 나타난다. 글로벌 마켓은 물론이고 국내의 경우에도 최근 몇 년간 청바지 마켓의 행보는 눈부시다. 청바지(blue jeans)를 중심으로 한 진(jeans) 시장 규모는 2000년 수천억 원대 수준이던 것이 2006년 기준 1조8000억 원대의 거대 시장으로 성장했다(출처: 패션비즈).
‘청바지 아저씨’ 늘어 프리미어진 각광
어쩌면 ‘20세기 말 이후 청바지 시장에 불황은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1970~1990년대에도 청바지는 국내외 젊은이들 사이에 가장 보편적 의상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다만 20세기를 지나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청바지는 고급 패션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이 더 빠르게 확대돼왔다. 청바지라고 다 똑같은 청바지가 아닌 것이다. 다양한 워싱과 후처리 효과, 디테일과 실루엣, 소재의 개발을 통해 청바지는 다채롭게 변화하며 성장하고 있다.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5만 원 안쪽의 저가 청바지가 있는가 하면 다이아몬드를 박은 1억5000만 원의 고가 수입 청바지도 있다. 실제 일명 ‘프리미엄진’으로 불리는 고가 수입 청바지 시장은 불과 3년 새 약 400억 원대 규모로 급성장했다. 관련업계에서는 고가의 프리미엄진의 매출 호조를 이끌어낸 데는 청바지의 새로운 소비자로 부상한 40대 이후 중년의 힘이 크다고 보고 있다. 미국에서도 50만~60만 원대의 프리미엄진은 의사, 변호사, 증권업계 종사자 등 고소득층이 주말에 정장 대신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의상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청바지는 왜 이렇게 성별과 연령을 불문하고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것일까. 핵심은 바로 ‘이미지’다. 패션정보그룹 PFIN 유수진 이사는 “청바지를 입는 이들은 단순히 ‘청바지’라는 의복 아이템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청바지가 가진 의미와 상징을 선호한다”고 단언했다. 청바지는 젊음과 자유, 저항 그리고 섹스의 이미지를 내포한다. 게다가 구겨지든, 찢어지든 어떻게 입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실용성의 장점도 있다.
애당초 청바지, 더 정확히 말해 진은 광부들을 위한 작업복으로 고안됐다. 1850년대 일확천금을 꿈꾸며 황금을 캐려고 골드 러시의 물결을 이루며 몰려든 떠돌이 노동자들의 옷이 고강도 노동에 쉽게 찢어지자 착안한 옷이다. 당시 독일 출신의 미국인 리바이 스트라우스(Levi Strauss)가 광부들에게 제공한 옷의 소재는 돛을 만들 때 쓰이는 질긴 천 캔버스였다. 옷감이 워낙 튼튼해 박음질도 튼튼하게 해야 했으며 구리로 된 대갈못을 이음쇠로 박아야 했다. 이것이 바로 청바지의 기원으로 당시 청바지는 ‘땀’의 상징이었다.
하층민의 작업복 용도로만 활용하던 청바지가 남녀 모두 즐겨 입는 캐주얼웨어로 거듭난 것은 1900년대 이후 미국에서 산업화 물결이 일 때다. 이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것을 계기로 전 세계적으로 보급됐다. 미국이 코카콜라와 팝송, 청바지를 앞세워 전 세계에 미국 문화를 심었다는 해석도 있다.
캘빈 클라인은 청바지에 섹스 이미지를 접목시킨 광고들(사진)로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캘빈클라인진코리아 제공> |
청바지가 ‘젊음’과 ‘저항’의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은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이 크다. 1950년대 영화 ‘이유 없는 반항’의 제임스 딘, ‘워터 프론트’의 말론 브랜도의 영향으로 청바지가 젊은이들 사이에 급속히 확산됐기 때문이다.
PFIN 유수진 이사는 “1950~60년대를 거치면서 청바지는 젊은이들의 반항과 히피 문화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패션코드가 됐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시인 이문재는 기자 시절 청바지와 관련한 글에서 “청바지는 1960년대 미국에서 ‘행동하는 의복’으로 떠올랐으며 반전, 반핵, 자유와 평등 그리고 페미니즘의 상징으로 위력을 발휘했다”고 기록했다.
이 글에서 이문재는 청바지로 상징되는 여성의 성 혁명을 주목했다. 그는 “치마에서 바지로 옮아간 복식사의 혁명은 엉덩이나 허리 옆에 있던 지퍼 혹은 단추가 ‘남자들과 똑같이’ 앞쪽으로, 성기 쪽으로, 더 정확하게는 상대방을 향해 정면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며 “이 이동은 청바지가 수행했다”고 기술했다. 종전에 등이나 허리 옆에 달렸던 지퍼나 단추는 타인의 손길을 전제한 것이지만 청바지를 통해 지퍼나 단추는 여성 자신의 것이 되었다는 해석이다. 국내에 청바지가 확산된 것은 1970년대로 당시 청바지는 생맥주, 장발과 함께 청년 문화의 상징으로 각인됐다.
요즘 40대 이후 중년들이 청바지에 시선을 돌린 데는 저항보다 젊음의 이미지를 소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실제로 뇌리에 입력된 이미지 덕분인지, 청바지는 입는 사람의 나이와 감각을 한결 젊어 보이게 한다.
비즈니스웨어 영역까지 폭 넓혀
스타일이 다양한 것은 물론 가격도 5만 원 안쪽의 저가상품부터 억대의 초고가 명품까지 천차만별이다. <경향신문> |
청바지가 섹스의 이미지를 덧입은 데는 캘빈 클라인이 기여한 바가 크다. 1980년 이후 캘빈 클라인의 청바지 광고는 남성들을 순식간에 매료시킬 만큼 선정적이기 때문이다.
강준만 교수는 ‘인물과사상’ 2000년 9월호에서 “진을 섹스와 결부시켜 팔아먹는 클라인의 천재적 감각이 본격적으로 선을 보인 것은 1980년, 당시 15세의 여배우 브룩 실즈를 모델로 내세운 텔레비전 광고를 통해서였다. 이름하여 ‘브룩 실즈의 노팬티 광고’다”(시사인물사전 9 : 쾌락의 독재)라고 기술했다.
미국의 패션 전문기자 리사 마시의 책 ‘캘빈 클라인’에 따르면 당시 브룩 실즈가 등장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광고의 카피는 “나와 캘빈 청바지 사이에 뭐가 있는지 아세요? 아무것도 없어요”다. 이 책은 “일부 방송국은 광고를 중단하거나 심야시간에만 내보냈지만, 뉴욕 시 방송국들이 개입하면서 여론은 점차 비등해졌다. 그들은 광고가 섹스를 찬양하고 동성애에 대한 모호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심리학자와 여성단체, 교육가들의 말을 인용하며 맹렬하게 공격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이 광고가 나간 지 한 달 만에 무려 200만 장의 청바지가 시중에 팔렸다는 점이다.
이후에도 캘빈 클라인의 광고는 가슴이 반쯤 드러난 채 밑위가 짧은 청바지 차림의 모델이 야릇한 표정으로 비스듬히 서 있거나 상반신에 옷을 걸치지 않고 청바지만 입고 서로 끌어안고 있는 남녀의 모습 등 섹시함을 강조한 이미지 일색이다. 실제로 잘록한 허리를 지나 둥근 엉덩이를 거쳐 곧게 뻗은 긴 다리로 이어지면서 인체의 곡선을 강조하는 청바지의 맵씨는 다른 어떤 패션 아이템보다 섹시하다.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성에 대한 호감은 국내 가요에서도 드러난다. 1970년 록그룹 ‘사랑과 평화’는 “청바지의 어여뿐 아가씨가 날 보고 윙크하네 처음 보는 날 보고 윙크하네 이것 참 야단났네”(‘청바지 아가씨’ 중)라며 청바지를 입은 예쁜 아가씨를 보며 설레는 남자의 마음을 표현했다. 또 1989년 변진섭은 ‘그런 여자를 만나고 싶다’는 희망사항을 나열한 노래에서 제일 먼저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희망사항’ 중)를 꼽았다. 이 노래의 가사를 만든 것은 여성 작곡가 노영심이지만 일반적으로 남성들이 선망하는 여성상을 그린 것임에는 틀림없다. 까놓고 말해 청바지를 입은 모습이 멋진 여성은 몸매가 예쁜 여성이기 때문이다. 허리와 골반, 엉덩이, 허벅지, 긴 다리가 적절한 비율로 구성된 여성이 그에 해당한다.
영국 디자이너 캐서린 햄넷은 “남자와 여자 대부분은 성교를 하기 위해 옷을 입는다”고 했고, 구찌 디자이너 탐 포드는 “진정한 패션의 환상은 섹스와 관련이 있다”고 피력했다. 패션이 성적 판타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청바지는 이 같은 의복의 기본 덕목에 매우 충실한 패션 아이템인 셈이다.
청바지는 이제 격식을 갖추어야 하는 비즈니스웨어의 영역까지 깊숙이 침투했다. 유수진 이사는 “21세기 트렌드가 포스트모더니즘과 경계의 무의미함을 내세운 이후 정장과 캐주얼, 격식과 비격식, 주류와 비주류, 서양과 동양의 명확한 구분은 촌스러운 옛것으로 내몰렸다”며 “따라서 진정 멋스러운 사람이라면 청바지에 정장 재킷을 걸쳐 입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조언했다.
단,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청바지의 핵심은 몸의 아름다움을 살릴 수 있도록 연출해야 한다는 것. 다리가 짧은 사람이라면 다리가 길어 보이는 부츠컷(허리에서 무릎까지는 폭이 좁고 무릎 아래부터는 폭이 넓은 스타일)을, 허벅지가 굵은 사람이라면 장식적인 실루엣보다 무난한 일자형을, 허리가 굵은 사람이라면 제 허리선 바지보다 골반 바지를 선택한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