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오봉展 』
Kwon O-Bong Solo Exhibition
▲ 권오봉, Untitled, Acrylic on Canvas, 112 x 145.5cm, 2009
● 사랑의 고백
★이달승(미술평론가)
그는 말한다. 억지로 그림을 그린다고. 억지 그림. 그래서 자신이 보기에 그가 그린 그림은 늘 서툴고 못났는가 보다. 이 서툴고 못난 그림을 행여 누가 볼까 마냥 쑥스럽고 조마조마한지, 자신의 그림을 걸어 놓은 전시장에 조차 그는 얼굴 내기를 꺼린다. 부끄럽기는 부끄러운 모양이다. 차마 벽에 걸린 저 부끄러운 그림들도 사실은 지워지고 버려지고 사라진 그의 수많은 그림들 속에 숨어 있어야할 것들이었는지도 모른다.
▲ 권오봉, Untitled, Acrylic on Canvas, 116 x 90.5cm, 2008
그러나 한 번 물어보자. 그는 왜 부끄러울까? 무엇이 그의 얼굴을 가리게 하고 무엇이 그의 그림을 부끄러운 것으로 만들까? 더 잘 그릴 수도 있는 데 하는 아쉬움 섞인 겸허일까? 화가의 부끄러움은 겸허와는 다르다. 더구나 겸허는 자칫 위선의 너스레로 흐르기 쉽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의 그림은 잘 그리고 못 그리고에 관한 부끄러움이 아니다. 이를테면 그의 부끄러움은 이러 저러한 아쉬움에 따른 반성의 부끄러움이 아닌 보다 근본적 회화적 감성에 관계하는 부끄러움이다. 부끄러움에서 한 화가의 정신적 태도보다는 감성의 결을 읽어야 하는 데는 까닭이 없지 않다.
“나는 서투른 화가여요. 잠 아니오는 잠자리에 누워서 손가락을 가슴에 대이고 당신의 코와 입과 두 볼에 샘이 파지는 것까지 그렸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작은 웃음이 떠도는 당신의 눈자위는 그리다가 백 번이나 지웠습니다.”
한 용운 ‘예술가’ 중에서
그렸습니다, 지웠습니다. 화가의 부끄러움은 잘 그리지 못한 데 대한 유감보다는 지우지 않을 수 없다는 회한 가운데 그려진다. 화가라면 그 누구라도 잘 그리고 싶은 마음이야 영롱하겠지만 차마 다하지 못한 듯 지워지는 부끄러움에 화가의 구슬픈 감성의 고백이 있다. 그렸습니다, 지웠습니다. 그의 선은 분명 찾으려 그은 선이건만 자꾸만 부서지고 내던져지고 지워지고 버려진다. 찾던 것이 없어지는 그 자체를 보기 위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일까. 찾으려 그은 선이었다면, 찾을수록 지워진다면 결국 그는 그어서는 그어서는 아니 될 선을 긋고 있는 셈이다. 왜 그리느냐고? 그는 결코 손에 붓을 들고 앉아서 생각에 잠기지 않는다. 오히려 생각을 털고 일어서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CONFESSION. 그렇게 그는 버리기 위해 그리는 괜한 짓을 억지로 하고 있다.
▲ 권오봉, Untitled, Acrylic on Canvas, 73 x 73cm, 2008
괜한 짓. 하지만 한 번 더 물어보자. 무엇이 그의 선을 괜한 짓이 되게 하는가. 억지로 그은 선이라지만 그가 선을 괜히 그은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로서는 불가피한 선이었는지도 모른다. 놀이처럼 그냥 해 본 짓거리라지만 실제로 놀이만큼 진지한 일도 없다. 아이들의 놀이가 그렇다. 니체의 말처럼 인간의 성숙이란 따지고 보면 어릴 적 놀이에 쏟은 진지함을 되찾는 일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는 장난삼아 그은 선이라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의 선은 더더욱 진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수사와 변명을 모르고 기량과 세련에 아랑곳 않는 유치할 정도로 단순한 선. 그만큼 그의 선은 눈치를 모르는 바보같이 솔직한 선이다. 눈치로 살찌우고 있는 오늘의 미술을 생각하면 그의 그림은 참 가난하면서도 꿋꿋하다. 누군가 예술가의 가난은 자발적 가난이라 하였지만 가난은 빼앗겼기 때문이 아니라 버리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의 선은 궁리하고 쌓아가는 선이 아니라 던지고 버리는 선이다. 버리는 선이기에 그의 선은 주저를 모르고 유감을 모른다. 이렇게 미련을 남기지 않는 그의 선은 삽시간의 방향과 각도만을 애정의 슬기로운 밑천으로 삼는다.
▲ 권오봉, Untitled, Acrylic on Canvas, 182 x 454cm, 2009
그런데 그림도 사랑의 장난과도 같은 일일까. 진지함마저 유감없는 장난인양 서둘러 (억지로) 그은 그의 선은 언제나 괜한 짓이 되고 만다. 참다 참다 연인에게 억지로 불쑥 털어놓은 사랑한다는 그 한 마디가 어쩌면 그렇게 쑥스러워 차라리 말하지 말아야했던 괜한 말이 되고 마는 것처럼. LOVE. 어쩔 수 없어 숨길 수 없었건만, 하고 나면 괜한 말. 사랑은 표현에 있지 않은 듯 만해는 그의 ‘님의 침묵’ 서시를 군말이라 이름하였다.
▲ 권오봉, Untitled, Acrylic on Canvas, 112 x 112cm, 2008
그래서 우리는 그의 그림을 격한 감정이나 울분의 토로라 말하지 않는다. 화가는 결코 우기거나 외치지 않는다. 잭슨 폴락은 격정으로 땅에 몸을 뉘여야 했고 고흐의 격정은 밤하늘의 별로 꽃피운다. 그에게도 격정이 없지는 않다. 화가의 격정은 내어지르는 격정이 아니다. 그의 격정의 검은 선도 사실은 화폭 아래 잠겨있던 어둠의 잠깐의 빛나는 선의일 뿐이다. 화가의 격정은 그 힘을 간절함에서 길어온다. 하지만 거기에는 어쩔 수 없으면서도 괜한 장난이라는 속절없는 슬픔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일까 이따금 간신히 그어지는 그의 곱고 가난한 선의 맑고 애처로운 아름다움은 못 다한 순정의 설움과도 같아 보인다.
어쩔 수 없으나 괜한 마음을 순정 아닌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다하고도 못다 함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순정. 그 못다 한 부끄러움이 자신을 던져 스스로를 있게 할 수 있는 절실한 이유이기에 순정은 곧 자유다. 자유란 다름 아닌 자신을 던져 바치는 것을 말한다. 연애는 자유다. 자신을 던지는 연애를 우리는 헤프다 말하지 않는다. 자유는 알뜰한 구속을 받고 있기에. 다름 아닌 꿈의 알뜰한 구속을. 그 자체로서는 비어 있는 괜한 꿈의 장엄한 구속을. 자유가 고독한 것은 이 때문인가. ⓒ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좋은 자유의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한 용운 ‘군말’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