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영복 교수 강의 '나의 東洋 古典 讀法' 제52회]
공자의 모습
공자와 『논어』에 대한 해석은 대단히 많고 각각 다양한 시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공자와 『논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공자는 조실부(早失父)의 천사(賤士) 출신으로 회계를 담당하는 위리(委吏), 목축을 담당하는 승전(乘田) 등 말직에서 시작하여 50세에 형벌을 관장하는 사구(司寇)에 이르렀습니다. 사구로 있을 당시 자기의 경쟁자이며 개혁가인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직권으로 죽였고 전(田)의 크기에 따라 징세하는 전부제(田賦制)에 반대하는 등 왕권주의자였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공자에 대한 단편적인 사실로써 공자를 규정하는 것은 전체를 보지 못하는 우(愚)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온당한 해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그에 관한 전문적인 해설을 소개하기는 어렵습니다. 내가 전문 연구자도 아닐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전 독법이 또한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공자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으로 마치려고 합니다.
공자는 스스로 비천한 출신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공자의 초기 입지를 국(國)이 아닌 야(野)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유가(儒家)의 발상 공간이 국과 국 사이의 야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야라는 공간은 국법 질서가 미치지 못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국의 질서에 저항하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사람들의 근거지이기도 했다는 것이지요. 이 근거지에서 소유(小儒)를 극복하고 인문 질서를 세우고 대유(大儒)의 길, 즉 군자(君子)의 도(道)를 지향했던 것이 공자와 공자학파라는 것이지요. 보수와 진보, 억압과 자유라는 두 개의 대립축 사이에 공자학파의 사상적 본령이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공자의 이러한 재야성(在野性)이 공자의 인간과 사상을 원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논어』가 갖는 최대의 매력은 그 속에 공자의 인간적 풍모가 풍부하게 담겨 있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자(子)는 학자를 뜻하고 가(家)는 학파를 뜻합니다만, 그 수많은 제자(諸子) 중에서 공자만큼 인간적 이미지를 남기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논어』라는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공자의 이미지가 미화되었다는 것이지요. 충분히 납득이 가는 주장입니다. 곽말약(郭沫若) 같은 대학자도 동의하는 것이지요. 공자의 인간적 면모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그의 묘비명이나 예찬문(禮讚文)을 읽을 것이 아니라 그의 반대자의 견해를 통하여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하지요.
나는 물론 공자의 인간적 면모가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자 사상은 하나의 사회사상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논어』는 공자 개인의 사상도 아니라고 생각하지요. 『마오어록』이 마오쩌둥 개인의 어록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집단적 사상이듯이 『논어』라는 책은 공자 사후에 공문孔門의 제자들이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공동으로 집필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공자의 면모에 관한 글 중에서 몇 가지를 소개하지요. 여러분이 평가해서 읽기 바랍니다.
외모(外貌)를 성(盛)하게 꾸며 세상을 미혹시키고 음악(音樂)을 만들어 우민을 음란(淫亂)하게 하고 오르내림의 예(禮)를 번잡하게 하며 음(音)도 율(律)로 만들었다. 명(名)을 세워 일을 게을리 하니 직(職)을 지키게 할 수 없으며, 상례(喪禮)를 중시하여 슬픔을 따르니 백성에게 사랑을 베풀게 할 수 없으며, 거만(倨慢)하여 스스로를 따르는 자이며 남의 나라에 들어가 상하(上下)를 이간(離間)하고 어지럽힌다.
전성자(田成子) 상(常)이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훔쳤으나 공자는 그의 예물을 받았다.
―『장자』莊子
우리나라에 번역된 나카지마 아츠지(中島敦)의 『역사 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들』(원제: 『李陵―山月記』)에는 공자의 인간적 면모가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물론 소설 형식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자인 자로와의 관계를 통하여 그리고 자로의 시각을 통하여 묘사되는 공자의 인간적 면모가 매우 사실적인 필치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공자를 골려주기 위해서 돼지와 수탉을 들고 소란을 피우며 찾아온 자로와의 첫 대면에서부터 자로가 죽임을 당하고 소금 절임이 되고 난 후 공자는 모든 젓갈을 내다 버리고 상에 올리지 않았다는 후일담에 이르기까지, 자로와 공자가 이루어내는 사제 관계는 그대로 인간관계의 아름다운 절정을 보여줍니다.
유가 사상도 다른 사상과 마찬가지로 시대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다양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유가를 유가이게끔 하는 지점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흔히 우리가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고 할 때 사(士)가 가장 상위의 계급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사농공상은 사민四民에 속하는 피지배계급입니다. 춘추전국시대는 공경대부(公卿大夫) 즉 제후와 대부를 지배계급으로 하고 사농공상을 피지배계급으로 하는 사회체제였습니다. 이러한 구도에서 사(士) 계급에 속하는 유가는 군자사(君子士)든 소인사(小人士)든 사 계급임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유가의 위상을 사의 사회적 역할과 관련시켜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과 관련하여 유가의 사상적 특징을 제3의 계급 사상 또는 중도 사상 또는 중화주의(中和主義)로 규정하는 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배 피지배의 이항 대립적 구도를 사인(士人) 계급이 개입하는 3각 구도로 바꾸고자 한 것이 바로 유가학파의 사상적 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도주의는 기본적으로 지배계급의 정치 논리입니다. 그런 점에서 공자와 유가학파가 복례(復禮) 복고(復古)주의자라고 비판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원래 주나라의 정치 구조는 천자를 정점으로 한 제후국 연방제입니다. 제1의 제후인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이러한 연방제적 구도가 주나라의 종법 제도입니다. 천자는 제후들에게 중립적이어야 하고 제후는 대부들에게 중립적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러한 사회체제의 정치론이었습니다. 중립적이지 않으면 그러한 질서가 유지되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나라 이름을 중국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중中은 상하통야(上下通也)의 뜻입니다. 그것이 정치 질서입니다. 유가 사상은 이러한 중도 사상을 계급적으로 확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士는 농공상(農工商) 같은 육체 노동을 하는 계급은 아니지만 공실(公室)이나 제후, 대부에게 고용되어 녹봉을 받는 무산계급(無産階級)입니다.
유가학파의 역사적 사명이 만세의 목탁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양자 대결 구도라는 오래된 사회적 갈등 구조에서 중도적 입장과 제3의 주체가 가질 수 있는 역할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주나라의 연방제적 성격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만 『논어』는 인간관계론의 보고(寶庫)입니다. 춘추전국시대에 백가(百家)들이 벌였던 토론(爭鳴)은 고대국가 건설이라는 사회학 중심의 담론이었습니다. 굳이 『논어』의 독자적 영역이라면 숱한 사회학적 담론 중에서 사회의 본질을 인간관계에 두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논어』의 제일 첫 장에 나타나는 친구(朋)의 이야기는 공자 사상의 핵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있는 성공회대학교를 찾아오는 분들을 환영하는 인사에서 내가 자주 인용하는 글입니다.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사실 성공회대학교는 먼 곳에 있는 학교거든요. 물론 서울의 변두리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만 우리 학교가 지향하는 교육 이념에서 본다면 더 멀리 떨어진 학교이지요. 우리 사회의 주류 담론에서 한참 밀려나 있는 비주류 담론 공간인 셈이지요. 그런 점까지 생각하면 참으로 먼 곳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학교를 찾아온 분들이 어찌 진정한 벗이 아닐 수 있으며 그것이 어찌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있겠느냐는 뜻이지요.
- 신영복의 강의'나의 동양 고전 독법' - 4.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중에서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