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언제 외로우냐? - 6회
송 영
나는 러시아 말을 거의 한 마디도 입 밖으로 꺼낼 줄 모른다. 오래 전 간단한 인사말 몇 마디를 익혔으나 정확한 발음은 잊어버렸고 그런 서툰 발음으로 지껄일 용기가 나지 않아 아예 입을 굳게 닫아 버렸다.
언어 때문에 나는 이 도시에서 벙어리이고 귀머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마치 자폐증에 빠진 소년처럼 혼자 문 밖으로 나가기가 겁났다. 엉뚱하게 먼 나라까지 와서 수인처럼 갇혀 살고 있다고 문 군에게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다. 길을 걷다가 아담한 카페를 발견하면 그곳에서 잠시 쉬고 싶어도 나는 그냥 지나쳐 버린다.
이런 때 명진이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피아노 연습에 바쁜 그녀를 아무 때나 불러낼 수는 없었다. 내가 유일하게 마음 놓고 찾아가는 식당이 하나 있다. 종합상가 건물 일층에 있는 피자 코너인데 나는 대체로 하루 한 차례는 그 가게 바깥에 임시로 마련된 야외 식탁에 앉아 있곤 했다. 그 가게 메뉴가 식성에는 맞지 않아도 거기서는 러시아 말을 한 마디 하지 않아도 간단하게 한 끼 해결이 되었다.
피자 코너는 모든 메뉴를 큰 유리 진열장 속에 진열해 두기 때문에 내가 손짓과 함께 한국말로 ‘이것!’ 혹은 ‘저것!’이라고 외치면 종업원은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초기에는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한국말의 이 지시대명사를 듣고 식당의 젊은 아가씨들이 자기네끼리 눈을 마주치며 야릇한 웃음을 입가에 흘리곤 했으나 같은 일을 몇 번 경험하자, 그들도 나의 독특한 주문 방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한 마디 말 때문에 가장 당혹스런 순간이 있었다. 가장 가까운 이웃 남자와 하루 한 번 꼴로 나는 계단이나 집 앞 행길에서 얼굴을 마주쳤다. 이 아파트는 두 가구가 하나의 중간 출입문을 이용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심한 대머리인 이웃집 남자는 마흔 전후로 보이는 중년인데 표정이 늘 밝은 호인풍의 사내이다.
그는 일정한 직업이 없는지, 혹은 임시로 직장을 쉬고 있는지 종일 집이나 집 앞 거리에서 빈둥거렸다. 그는 바깥 큰 문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나와 마주치면 손을 번쩍 치켜들고 크고 굵은 목소리로 인사말을 내게 건넨다. 얼굴에는 이웃에 대한 친밀감을 드러내는 웃음이 넘친다.
나도 러시아의 가장 보편적인 인사말인 한 마디, ‘드라스비체!’는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사내는 마주칠 때마다 그 보편적인 인사말 대신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말로 인사를 했다. 그 뜻은 추측컨대 ‘드라스비체!’보다 더욱 각별한 내용일 것이다. 호의와 친밀감이 듬뿍 담긴 이 사내의 인사를 받은 나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계단에서 잠시 쩔쩔매고 있다. 나는 숨을 수 있다면 숨고만 싶었다.
그런데 사실은 나도 이 친절한 이웃남자와 그의 아내에게 그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속마음으로는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부부는 거의 매일 밤 부부싸움을 벌였고 나는 이들의 부부싸움을 거의 놓치지 않고 엿듣고 있기 때문이다.
벽은 방음 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들이 다투는 소리는 가감 없이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 주로 얘기를 길게 늘어놓는 쪽은 여자 쪽이고 남자는 이따금 타악기의 폭발음 같은 고함을 짧게 지른다. 싸움은 한 시간, 때로는 자정에서 새벽까지 이어진다.
물론 나는 그들의 말을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싸움이 이 지구 위에 사는 인종이라면 누구나 경험하게 마련인 흔한 부부 싸움이란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하는 싸움의 내용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지구 위에 사는 모든 인종들의 모든 부부 싸움이란 대체로 같은 주제와 내용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언젠가 담배와 간식용 과자를 사 가지고 들어오다가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옆집 부인과 마주쳤다. 여자는 개를 산책시키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몸집이 송아지만큼 크고 두 귀가 축 늘어진 갈색 개의 목을 여자는 한쪽 팔로 껴안고 서 있었는데 그녀가 마치 개를 친자식처럼 애지중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에 대한 정성은 남자도 지지 않았다. 그가 아파트 앞길 건너편 공원에서 개와 함께 산책하는 장면을 나는 여러 차례 목격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개는 세상 이치를 모두 훤히 알고 있는 성숙한 영물처럼 점잖고 의젓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부가 한결 같이 개에게 지극한 정성을 기울이는 걸 보면 이 개야말로 이 가정을 지탱시켜 주고 부부 사이를 연결해 주는 이 집의 기둥이란 생각마저 하게 되었다.
화장을 거의 하지 않은 여자의 얼굴에는 잔주름이 많았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여자는 의젓하고 품위 있는 웃음으로 내게 인사했다. 그녀는 내게 엘리베이터 차례를 사양했다. 이방인 이웃에 대한 너그러운 배려였다.
구식이고 소형인 엘리베이터는 큰 개와 사람 둘이 함께 들어갈 수 없었다. 이 부인의 표정에서 밤을 새워 가며 부부 싸움을 벌이는 그악스런 여인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대머리인 남편에 비하면 여자는 적어도 십년 이상 나이 많은 여인처럼 보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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