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 5세기 경, 인도를 떠나 중국 남경(南京)에 도착한 달마대사(達磨大師)는
당시 불사의 업적이 뛰어난 양(梁)나라 무제(武帝)와의 만남에서
양무제의 무공덕(無功德)을 감히 말하였다.
< 經典을 보고 달마는 "흰 것은 종이이고 검은 것은 글자" 일 뿐이라고 말하였다 >
武帝 : “짐은 수많은 사찰을 짓고 경전을 출판하며 佛事에 전념하였는데
이런 나의 업적에 어떤 공덕이 있겠소?”
達磨 : “無功德(그런 것은 아무런 공덕이 될 수 없습니다)”
武帝 : “이 정도가 아무 것도 아닌 無功德이라니.... 어찌하여 그렇단 말이요”
達磨 :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하지 않으면 단지 쓰레기일 뿐입니다”
武帝 : “그러면 부처님은 무엇을 가르쳤으며 佛法에서 깨달음이란 대체 무엇이요“
達磨 : “부처님은 아무 것도 가르치신 것이 없습니다.
깨달음과 진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眞理는 확연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聖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武帝 : “나를 이렇게 대하는 그대는 도대체 무엇이요”
達磨 : “그 것은 저도 모릅니다”
내심으로 자기 업적을 인정받고 싶어 했던 梁武帝와의 이런 짧은 대화를 마치고
達磨는 갈대를 꺾어 타고 양자강(揚子江)을 건너서 숭산에 있는 소림사로 와서는
9년간 동굴속에서 홀로 면벽좌선(面壁坐禪)의 수행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 억겁(億劫) 세월의 무게를 홀로 짊어진 揚子江은 오늘도 조용히 흐르고 있다 >
南印度 향지국의 셋째 왕자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지혜가 뛰어났다고 한다.
그 후 달마는 주위의 모든 것을 버린 채 出家하여 보리달마라는 법명으로 불법에
전념하다가 그의 스승인 반야다라(般若多羅)의 뜻에 따라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중국으로 향하였던 것이다.
동굴에서 조용히 면벽좌선에 잠긴 달마에게 어느 날 낙양의 신광(神光)이라는
한 구도자가 찾아 오는데 그를 제자로 삼는 설화는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눈이 오는 어느 날 뜰 앞에서 오랫동안 꼼짝하지도 않고 서있는 구도자 神光에게
“네가 눈 가운데 서서 무엇을 구하려 하느냐” 라고 달마가 묻자
“바라옵건대 스승님께서 가르침을 주셔서 널리 중생(衆生)을 구제하게 하소서”
라고 하였으니
“불법이란 오랜 기간동안의 정진으로 어렵고 참기 힘든 모든 것들을 능히 행하고
또 참음으로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너는 조그마한 덕과 지혜로서
그 것을 구하려 하느냐” 라고 달마는 대꾸하였다.
이에 神光은 칼로 자신의 왼쪽 팔을 잘라서 달마에게 바치자 구도를 향한 神光의
큰 용기를 가상히 여긴 달마는 그를 제자로 삼고 혜가(惠可)라는 법명을 주었다.
달마의 종지(宗旨)를 이어받은 혜가는 중국의 선종(禪宗)을 크게 번창하게 하였고
오늘에 이르러 소림사는 중국 禪宗의 중심이 되어 있는 것이다.
< 1,500년 달마대사의 철학과 이야기를 말없이 간직하고 있는 소림사 >
北京에서 비행기로 2시간 정도 남쪽으로 내려오면 정주(定州)에 다다르게 되는데
여기는 삼국지의 주무대로 등장하는 그야말로 중원(中原)인 것이다.
당시 중국의 개방은 연안의 經濟特區를 중심으로 투자가 활발히 이루어 졌으나
지리적으로 內地에 있는 中原은 아직도 개방의 물결이 그리 세지 못한 시기였다.
定州에 내려 다시 승용차로 두시간 정도를 달리면 河南省 등봉현 소실봉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소림사에 이르게 된다.
약 1,500년 전 창건된 少林寺는 달마대사와 전통무예인 소림권법(少林拳法)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나에게는 무척 오래 전부터 꼭 찾아 보고 싶어했던 달마의 혼이 있는 곳이었다.
테마여행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저 둘러보는 하나의 사찰 관광일 뿐,
사찰 주위에는 상업화의 냄새까지 흠뻑 젖어있어 사전에 많은 공부를 하지 않고
찾아가면 그 깊은 뜻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은 곳임을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
경내에는 고구려 양만춘(楊萬春) 장군과의 안시성(安市城) 전투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이 세운 비석이 천년풍상을 홀로 겪은 채
서 있었는데 촘촘히 쓰여진 비문에는 소림사가 唐太宗의 중국 통일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 적혀 있었고 당태종이 이를 보답하기 위해 여기에 비를 세우고
천하제일 명찰(天下第一 名刹)이라고 부르게 하였다는 것이다.
아직도 소림사에는 소림의 무예를 익히려는 수 많은 수련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고 있으며 주변에는 수많은 무술도장이 산재하고 있어
신출귀몰(神出鬼沒)의 옛 무예가 지금까지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 동행했던 직원과 소림사 앞에서 한 컷 기념사진을 찍었다 >
9년간의 오랜 면벽좌선으로 인해 달마대사의 얼굴이 그대로 바위 벽에 투영되어
새겨졌다고 전해오고 있었는데, 달마상이 새겨져 있는 바위는 우리들을 한층 더
신비로움으로 접어들게 하였다.
달마의 얼굴이 투영되어 있는 바위를 대하는 바로 이 순간에도 달마는 우리에게
禪의 수행법을 쉼없이 가르쳐주고 있었다.
世俗의 인연을 정지시키고.....
자신의 청정본심(淸淨本心)을 볼 수 있는 안심벽관(安心壁觀)과.....
이입사행(二入四行) 을.........
면벽을 통하여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이치(理致)로 깨닫는 理入과 스스로 행하는 행입(行入)을 뜻하는 이입(二入)과
4 가지 실천행을 말하는 四行을 통함으로서.....
소림사 옆에는 크고 작은 많은 사리탑(舍利塔)이 모여 탑림(塔林)을 이루고 있어
당시 고승들의 힘들었던 고행의 시간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 苦行의 산물인 선승들의 사리를 모아둔 사리탑이 塔林을 이루고 있다 >
살아서 지은 업보(業報)에 따라 다음에는 몸을 바꾸어 윤회(輪廻)를 한다더니만,
塔林을 둘러싸고 뜻 모르게 짖어대는 벌레들의 울음소리마저도 오늘은 예사로이
들리지 않았다.
적멸(寂滅)과 입적(入寂)의 윤회(輪廻)를 생각하면서 塔林을 헤치고 나오는 길에
문득 스승 達磨와 제자 惠可사이의 선문답(禪問答)이 머리속에 조용히 맴돌았다.
惠可 : “스승님 저는 아직도 제 마음의 平安함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達磨 : “그러면 너의 그런 마음을 가져 오너라. 내가 너에게 安心을 주리라”
惠可 : “마음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達磨 : “찾아진다면 그것이 어찌 너의 마음이겠느냐
나는 이미 너의 마음에 平安함을 주었느니라”
순간 잠시나마 나 역시 욕망과 번뇌(煩惱)로 무거워진 내 마음을 찾을 수 없었다.
達磨大師가 나의 마음에까지도 평안함을 주었기 때문이었을까.....
소림사를 등지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맥없이 머리를 깊게 떨어뜨리고는....
말없이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조그만 무엇 하나도 비우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나약한 나 자신이 너무도 미웠다.
그저 찰라(刹那)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떨치지 못하는 끝없는 慾心이.....
너무 부끄러웠다.
레이(유원덕)
< 定州市長 및 공산당 書記와의 世俗的(?) 만찬에서 건배를 제의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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