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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라 던컨 -무용수-

ㄹl브ㄱL 2007. 6. 1. 18:43


    이사도라 던컨 (1877 ~ 1927)

    미국 태생의 이사도라 던컨(1878~1927)은 모던 댄스의 개척자로 불리운다. 187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15살 때에는 뉴욕에서 델리의 무대에 출연했다. 그후 1~2년간 자신만의 무용을 했으며 관객을 사로잡아 상당한 재산을 모으며 유럽과 북미 양 대륙에 이름을 떨쳤다.

    그녀는 음악 교사인 어머니로부터 음악적 기초 교육을 받았고 아울러 발레도 습득하였다. 가난한 무명의 젊은 무용가로 유럽에 건너갔던 이사도라는 무용의 역사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무용에 대한 관객의 개념까지 변화시켰다. 그녀는 태어나면서 부터 자연을 사랑한 반항적 기질이 있었으며, 그래서 인공적인 기법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1897년 18세의 이사도라는 델리단원으로 영국에 건너가 델리의 주선으로 발레지도를 받았다. 뉴욕으로 돌아온 이사도라는 다시 본판티의 지도를 받았다. 비록 이사도라는 발레가 비표현적이라하여 반대하였지만, 기본적인 발레지도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일반적인 대중의 견해와는 달리 이사도라는 무대 위에서 얻어지는 순간적인 착상으로 춤추지 않았다. 옷감 선택에서부터 의상 제작, 배경활동 등 모두를 세밀히 준비하였다. 이 점이 그녀의 재능이며, 또한 무용이 가식없이 보이도록 노력하는 의도였다. 자신의 신무용에 대해 명료하고도 능숙한 포용력을 지닌 이사도라는 공상적으로 작품을 시도했다. 그 결과 그녀는 1899년 시카고 데뷔 공연 때는 맨발에 거의 반나체의 모습으로 춤을 추었다. 그때까지 기교 위주의 발레밖에 보지 못한 관객들은 그 장면을 보고 놀랐으며 그녀의 무대의상의 양상까지 변화시켜 이사도라 이후 발레를 포함한 모든 무용수들은 유행에 얽매인 의상보다 적절한 무용의상을 입고자 했다.

    그녀는 1900년에 유럽으로 건너갔다. 이사도라는 그 해에 파리에서 새로운 무용을 발표해 절찬을 받았으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유럽의 각 도시를 순회 공연하였다. 그녀의 공연 중에서 가장 강력한 지지를 받은 곳이 독일이었다. 그녀가 일으킨 혁명은 발레에 대한 반항이요, 나아가 그 당시 남자와 여자들의 사고방식을 거부하는 반기였다. 미국 여성들의 참정권 운동이 시작되고 남자와 여자에게 균등한 기회를 요구하는 결의가 여성들 사이에서 번져가던 때, 이사도라는 독일의 신무용 탄생에 적지않은 기여를 했다. 그리고 그녀가 독일 베를린 근처의 그뤼네발트에 무용학교를 설립한 것은 1904년이었다. 또한 1905년 러시아 방문 공연은 러시아 발레의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발레뤼스가 결성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녀의 무용에서의 자연주의란, 인공적인 기교 제일주의의 고전 발레에 대한 반발인 것이며, 또한 기성의 음악곡으로 부터 받은 인상을 그대로 무용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그녀는 기법이나 표현 그 자체에 대한 표현을 주장하였고 무용 예술을 소수의 전문가로부터 개방하여 대중의 손으로 옮기는 일을 개척하였다. 20세기를 맞을 때까지 독일은 무용면에서는 참으로 빈곤한 나라였다. 그러한 독일의 19세기이후 프리드리히 얀(1778~1852)이라든가 구츠무츠(1759~1839)가 제창한 육체문화운동이 국민 전반에 보급되었다. 물론 이 운동에 영향을 주고 목표를 제시한 사람은 이사도라이다. 그 후 독일의 각 도시에서는 수많은 일반인이 이사도라의 신무용을 향해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을 신무용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것은 무용적인 보건운동의 영역을 벗어나지를 못했다.

    그녀의 50회 생일이 다가올 즈음 새로이 알게 된 친구와 드라이브를 하러 나가기로 약속한 이사도라는 목에 붉은 빛깔의 스카프를 두르고 언제나처럼 한쪽 같을 끌면서 차에 올랐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이사도라의 목이 젖혀지면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돌아갔다. 이사도라는 작품을 미완성한 채 자신의 새로운 춤이 어떻게 규명될 지 모른 채 죽은 것이다. 또한 던컨 무용학교를 전세계에 세우고자 했던 그녀의 꿈도 실현되지 못했다.

    그녀는 아주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이다. 그녀는 무용이 육체의 동작을 매개로 한 인간 정신의 신성한 표현이라고 한다.

    이사도라는 영혼의 춤을 추었고 춤을 종교와 동격으로 두면서 춤을 통한 종교의 무용을 주장했다. 그녀는 모든 속박을 깨뜨리는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준 화려한 실례로서 대중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뒤흔들어 놓았다. 그녀를 미국에서 발생한 이 예술의 창시자로 평가하는 것은 그녀의 뒤를 이어 그녀의 독창적인 움직임의 양식을 흉내내거나 발전시킨 루스, 세인트,, 데니스, 도리스, 헌프리, 마사 그라함 등의 거물의 이름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클래식 발레의 규범과 인공적인 양식에 반대해서 무용을 인간의 강렬한 표현형태로 발전시킨데 있는 것이다.

    던컨은 그녀가 무용의 정수라고 믿은 자연스럽고 열정적인 단순성으로의 복귀를 주장했다. 그녀의 창작 방법은 창조적인 선구자라면 누구나 취했어야 할 기본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진실로 인간의 영혼을 육체의 움직임이라는 수단으로 성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무용을 추구한 것이다.

    던컨의 표현은 때로는 너무 천진스러운 것이었지만 1930년대와 1960년대의 자유주의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그녀는 활동적이고 주체성이 강한 여성이고, 여성임을 영광되고 한 인물이며 그러면서도 그녀의 일을 수행해 나가는 데에 타협을 몰랐던 여성의 표본으로 평가되고 있다.

    Isadora Duncan (이사도라 던컨 1877.5.26~ 1927.9.14)

    여자가 남자에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결혼하면, 나의 미모와 당신의 지성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겠지요." 남자가 대답했다고 한다. "나의 외모와 당신의 지성이면 어떻겠소?" 이 때 남자는 물론 미남이 아니고, 그런 질문을 하는 여자도 그리 물려받을 만한 지성의 소유자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우스개의 주인공이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과 극작가 버나드 쇼오라는 설이 있다. 독설가에 여성혐오가로 유명했던 버나드 쇼오는 그렇다 치더라도, 과연 이사도라 던컨이 그런 어리석은 자만으로 야유를 당한 장본인이었을까? 정말로 그녀가 스무 살이나 더 나이가 많은 괴퍅한 극작가에게 그런 식으로 구애를 했다가 거절 당했다는 말인가? 사실 여부를 떠나 그런 일화에 그녀의 이름이 들먹여진다는 것은 그녀에 대한 일반인의 시각을 시사해주는 면이 없지 않다. 자유연애를 구가했던 이사도라, 자기 육체에 대해 부끄럼이 없었던 이사도라, 자신감과 정열로 넘쳤던 이사도라, 그 정도가 지나쳐 깊이가 없고 어리석은 여인으로까지 비쳤던 이사도라......

    배 고픈 어린 시절

    그녀의 아버지는 은행의 출납계원이면서 시를 썼고 어머니는 음악 선생이었다. 그러나 시인 아버지는 노처녀와 사랑에 빠져 어머니와 이혼을 했다. 이사도라가 태어난 직후의 일이었다. 어머니는 네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힘겨운 살림을 꾸려나갔다. 이혼의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불가지론자 로버트 그린 잉거솔의 적극적인 추종자가 된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종교에 있어서나 인습에 있어서나 반항적인 태도를 심어 주었다. 거기다 타고난 예술가 기질까지 더하여, 아이들은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자라났다.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춤을 추었다는 이사도라는 언니 엘리자베스와 함께 이미 십대부터 이미 동네 어린아이들에게 춤을 가르쳐 생계를 벌었다. 춤으로 돈벌이를 해보려는 노력은 싸구려 뮤직홀에서 춤추는 일로 이어졌고, 그러다가 흥행사의 눈에 띄어 단역을 맡은 것을 계기로 뉴욕의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정식 발레가 아니라 음악이나 시에 맞추어 즉흥적 춤을 추는 소녀는 관객들에게 일시적인 흥미밖에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영광과 갈채의 나날

    유럽행을 결심한 것은 스물한 살 때였다. 거의 빈털터리나 다름없이 가축운송선을 타고 런던에 도착한 그녀와 형제들은 우연한 도움으로 - 달밤에 춤을 추다가 정상의 여배우 캠벨의 눈에 띄어서라는 것이 전설적인 설명이다 - 런던 사교계에 소개되었다. 이후로는 갈채의 나날이었다. 나무의 요정과도 같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사지를 드러내는 얇은 의상을 걸친 채 맨발로 자유롭게 걷고 달리고 뛰고 구르는 것만으로 내면의 정서를 표현하는 이 아름다운 무용수는 런던, 파리, 베를린, 가는 곳에서마다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뮌헨에서는 학생들이 공연이 끝나고 돌아가는 그녀의 마차에서 말을 떼어버리고 자신들이 마차를 끌기까지 했다.

    1903년에는 형제들과 함께 그리스에 가서 고대적인 풍광 가운데 자신을 풀어놓고 일년 내내 마음껏 춤추며 지냈으며, 1904년에는 독일의 그루네발트에 학교를 세우고 빈민층 소녀들을 가르치랴 재원 마련을 위해 순회 공연을 하랴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꿈과 포부가 그대로 펼쳐지는 시절이었다

    그 무렵에는 춤에 대한 그녀의 생각도 무르익어 있었다. 파도나 바람 같은 자연 현상에서 영감을 얻은 유연한 동작으로 내적 감정을 표출하던 그녀는 대영박물관에서 고대 그리스의 조각들을 보고 그 흐르는 듯한 인체의 곡선이야말로 항구적인 아름다움의 이상임을 확인했으며, 독일에서는 니체의 사상에 깨우침을 받아 춤이야말로 인간의 영혼을 가장 자유롭게 표현하여 종교의 경지에까지 이르는 고도의 예술임을 선언했다.

    "무용수는 오랜 연구와 기도와 영감의 작업을 통해 자신의 육체가 영혼의 빛나는 표현임을 터득한다. 그의 몸은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악에 맞추어 춤추면서 보다 심원한 세계로부터 오는 무엇인가를 표현하게 된다. 이런 무용수야말로 진정 창조적인 무용수이다. 자연을 본받되 모방하지 아니하고, 자기자신으로부터 우러나는 동작으로 말하되 모든 자아보다 위대한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비운의 여인

    전통이나 관습에 반항적인 태도는 사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모의 불행한 결혼을 보고서 이미 열두 살 때 독신을 맹세한 터였지만, 사랑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녀였다. 1906년에는 런던의 무대 디자이너 고든 크레이그에게서 첫 딸을 낳았으며, 1910년에는 미국의 부호 파리스 싱어에게서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1913년에는 그 두 아이가 유모와 함께 자동차에 탄 채 세느 강에 익사하는 비운도 겪었다.

    불행을 딛고 파리에 다시 학교를 열려던 계획이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무산되자 미국으로 돌아갔던 그녀는 세번째 아이를 사산했고, 종전 후 남아메리카,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 순회공연을 계속했지만 이전 만한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1920년에는 모스크바 무용학교 설립을 위촉 받아 러시아에 갔다가 17세나 연하인 천재 시인 에세닌을 만나 결혼했으나, 당시 반공산주의 분위기가 팽배해 있던 미국에서 두 사람은 '볼셰비키'로 낙인 찍혀 다시금 방랑길에 올라야 했다. 유럽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에세닌은 혼자 러시아로 돌아가 1925년 자살했다

    극적인 죽음

    사랑하는 자녀들의 죽음, 사산, 예술가로서의 좌절, 불행한 결혼 생활, 남편의 자살...... 그녀의 말년은 비운으로 얼룩졌다. 그리고 그 화려하고도 파란 많은 생애는 극적인 죽음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남불의 휴양지 리비에라 해안의 니스에서였다. 그녀를 숭배하는 젊은 청년이 스포츠카를 가지고 와서 드라이브를 권했다. 다소 차가운 날씨였으므로, 그녀는 쇼올을 둘렀다. 가장자리에 달린 술 장식의 길이만 45센티나 되는 길고 붉은 비단 쇼올이었다. 차가 출발하는 순간, 술이 바퀴에 말려들어갔고, 그녀는 목이 졸려 즉사했다.

    "한 발은 록키 산맥의 정상에 딛고 양 손으로는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를 품어 안은 채, 머리로는 하늘을 이고 그 이마에 무수한 별들의 왕관을 쓴" 우주적인 무용수가 되기를 원했던 여성은 길지 않은 생애를 이렇게 마감했다. 그러나 그녀가 온 몸으로 보여준 모범을 통해 무용은 음악이나 미술, 시와 나란히 정상의 예술로서 자리잡게 되었으며, 그녀가 모색한 이른바 "미래의 무용"은 오늘날 현대 무용의 터전이 되었다. "한 발은 록키 산맥의 정상에......"라던 그녀의 그림자는 실제로 무용의 하늘에 그렇게 남아 있지 아니한가.



    Isadora (맨발의 이사도라) / Paul Mauriat

    무드 음악의 거장 "폴 모리아"의 1968년 곡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5주간 정상에 올랐던 곡이다.


    원곡은 앙드레 포프의 작품으로 1967년 제12회
    유로비전 송컨테스트에 룩샘 부르크 대표로 출전한
    "비키 레안드로스"가 불렀다.

    다음해 1968년 폴 모리아 악단이 발표하여
    사상 최대의 인기를 모은 곡이다.

    폴 모리아는 국내에도 다녀간바 있는 팝 오케스트라의 대명사로
    지금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