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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제177회]
사람은 부모보다 시대를 닮는다
아버님께
형님 오시면 말씀드릴 요량으로 하루 이틀 미루다 너무 늦었습니다만 아버님 하서와 {개자원보}(芥子園譜) 진작 받았습니다. 내일이 섣달 그믐, 새삼 어머님 환후에 생각이 미쳐 소용도 없는 걱정입니다. 노구에 중환이라 회복이 더딜 수밖에 없겠습니다만 욕심에 지금쯤 털고 일어나시지나 않았나 바라기도 합니다. 오는 춘삼월께는 병상의 구진(垢塵)을 말끔히 떨어버리고 가볍게 봄나들이 하실 수 있는 '회춘'(回春)을 빕니다.
아버님께선 어머님 간호하시느라 달리 틈이 없으시리라 짐작됩니다만 얼마 전 간행된 {조선 전기 사회경제 연구} 혹시 일독하셨는지, 아마 아버님 집필에 참고되리라 믿습니다.
역사 연구에 있어서의 사회경제적 분석은 특정 사상이 연유하고 있는 물질적 토대로부터의 귀납적 인식을 주고, 그것에 대한 거시적이고 범주적인 이해를 뒷받침해줌으로써, '나무는 보되 숲은 보지 못하는' 관견(管見)의 우(愚)를 막아준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아버님께서 다루고 계시는 시대는 아직도 사가(史家)들에 따라 각기 다르게 주장되고 있는 시대이니만치, 사회경제적 분석에 의한 검토가 선행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어떤 사상체계에 있어서 개인의 역할과 창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개인은 언제나 시대와 사회라는 시공적(時空的) 상황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개인이 자유롭게 결정했던 일들에 있어서마저도 나중에는 그것에 일관된 방향을 부여한 사회경제적 법칙이 스스로 윤곽을 드러내는 예를 허다히 보게 됩니다.
심지어는 어느 개인의 독창이라고 일컬어지는 사상이나 업적도 대개는 그 개인의 정신세계 내에서 굴절, 추상, 재편된 상황 그 자체인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사명당실기}의 서두에서 인용하신 "사람은 그 부모보다 그 시대를 닮는다"는 아버님의 글이 이상의 모든 서술의 압축이라 하겠습니다. 이번의 점필재 연구에 있어서도 이러한 입장이 견지되어야 하리라 믿습니다.
소대한(小大寒) 다 지나고도 연일 강추위가 기승이더니 오늘은 비닐창에 상화(霜花) 피지 않은 눅은 날씨입니다. 겨울 추위도 정미(正味) 1월 한 달입니다. 2월, 3월, 4월……, 겨울을 춥게 사는 사람은 대신 봄을 일찍 발견합니다.
1984. 1. 31.
- 신영복의 '한 포기 키 작은 풀로 서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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