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언제 외로우냐? - 2회
송 영
식당을 찾는 동안 명진은 며칠 전 처음 만났을 때 내게 건넸던 음반에 관해 서둘러 묻지 않았다. 말은 없지만 거기에 마음을 크게 쓰고 있다는 증거다.
‘시간 때우기 힘드실 때 들어 보세요.’
헤어질 때 그녀는 불쑥 내게 그 음반을 건넸다. 나는 무심코 그것을 받았지만 돌아갈 때 생각해봤더니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만약 연주가 신통치 않으면 어쩌나 하고. 명진은 십이 년째 피아노에 매달려 이 먼 나라의 도시에서 머물고 있다. 초등학교 오학년 때 와서 지금은 대학원 마지막 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사춘기와 젊은 나이의 태반을 이곳에서 보낸 것이다. 피아노는 그녀에게 목숨과 같다. 차도를 몇 번 건넌 끝에 겨우 명진이 식당을 찾아냈다. 지하에 있는 조그만 식당인데 인도에서 계단으로 내려가는 입구에 작은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이 집이 값이 싸고 음식을 잘 해요. 점심때는 반값에도 먹는데 지금은 안 되겠어요.”
좁은 홀로 내려가서 겨우 구석에 두 사람이 끼어들 자리를 찾아냈다.
“날마다 메뉴가 바뀌는데 마침 오늘 연어 스테이크가 나오네요. 연어 스테이크 말고 이 집에 생선 수프도 맛이 있는데.”
“그럼 수프로 하자. 검은 빵에 생선 수프.”
지하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후식으로 커피를 마셨다. 이쯤에서 아무래도 그 음반 얘기를 꺼내야 할 것 같았다. 잠자코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무심해서 듣지도 않았다는 오해를 받게 된다. 성격이 무척 밝은 이 아가씨의 심정이 지금 그다지 편하지 않다는 걸 나는 첫날부터 알았다. 그녀는 아파트를 빌려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고 있으며 자영업을 한다는 아버지는 홀로 서울에서 지내고 있다. 한국의 어머니가 흔히 그렇듯 명진의 어머니도 딸의 음악 수업을 위해 이 추운 나라에서 십이 년째 보내고 있다. 그 어머니는 삶의 맛이 가장 무르녹은 자신의 황금시절을 딸의 피아노에 몽땅 바쳐 버린 것이다.
첫날 얼굴을 마주치자, 나는 아주 상투적인 질문부터 했다.
“콩쿠르에는 나갔겠지? 그런 기회가 참 많았을 텐데”
내가 무심코 던진 말에 명진이 화들짝 놀랐다.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몇 번 나갔지만 잘 안 되었어요.”
“괜찮아. 기회는 얼마든지 또 있지.”
“이젠 기회도 없어요. 괜찮지도 않고요.”
잠시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지난 겨울에 엄마가 뭐라 하신 줄 아세요? ……새해에도 아무런 결과물이 없으면 모녀가 모스크바 강으로 뛰어들재요. 우리 동네 스포르찌나 역에서 한 정거장만 나가면 강 위로 철교가 지나가요.”
“그래서 뭐라고 했지?”
“그런다고 했죠.”
“뭐가 그리 심각한가?”
“당사자가 아니면 잘 모르죠. 앞이 캄캄해요. 돈 많은 부자가 뒤에서 밀어 주는 것도 아니고 서울에 가도 발붙일 데가 없어요. 그래서 요즘은 다 잊고 살아요.”
괜히 콩쿠르 얘기를 꺼냈다가 첫날은 끝까지 우울한 분위기를 지워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날 건네받은 가제음반을 아주 신중하게 들어 봤을 것이다. 아파트에는 방의 주인이 사용하는 미니 컴포넌트가 있었다. 우리는 식당에서 나와서 거기서 가까운 레닌도서관 광장으로 갔다. 광장에는 실물보다 몇 갑절은 커 보이는 레닌 동상이 아직 남아 있고 동상 주위에는 시민의 휴식을 위해 여러 개의 벤치들이 놓여 있었다. 자리를 옮기고 잠시 숨을 고른 뒤에 나는 겨우 그 음반 얘기를 꺼냈다.
“발라키레프가 편곡한 〈종달새〉는 들을 만하더라.”
“곡이 마음에 드세요?”
“곡도 좋고 연주도 훌륭했어. 내가 열 번도 더 들었을 걸.”
명진이 준 음반에는 주로 러시아 곡들만 여럿 있었는데 그링카의 노래를 편곡한 이 짧은 피아노 소품이 가장 돋보였다.
“호호, 영광이네요. 시끄러운 데서 녹음해서 걱정했는데.”
명진의 얼굴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녀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우리 엄마가 이런 평가를 직접 들었어야 하는데.”
“다음에 그런 기회가 오면 내가 직접 말할게. 넌 러시아 민속 분위기를 썩 잘 그려내더라. 여기 오래 살아서 그런가. 하긴 오래 산다고 누구나 그렇게 할 수는 없지.”
“그렇잖아도 러시아 곡만으로 음반 한 장을 꾸며 보고 싶었어요.”
“좋은 생각이야. 내가 음반 제작자라면 당장 계약하겠는데. 그런데 쇼팽은 치지 않나?”
“왜요? 자주 치는데요.”
“알고 있겠지만 서울에서는 쇼팽을 쳐야 인기를 얻어. 다음에는 네가 친 쇼팽을 한번 듣고 싶어. 네가 쇼팽을 발라키레프 곡만큼만 친다면 모스크바 강에 뛰어들지 않아도 되겠더라.”
“선생님이 다차에서 돌아오신 다음에도 시간이 주어진다면 꼭 들려 드리죠. 거기가 어디라고 하셨죠? 랴잔의…….”
“콘스탄찌노보.”
“아아 콘스탄찌노보는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저는 러시아에서 십사 년째 살아오지만 그렇게 풍광이 좋은 곳은 처음 봤어요. 직접 가서 보시면 선생님도 감탄이 절로 나올 겁니다.”
문 군은 몇 달 전 K가 그를 그곳으로 데려가서 하루 동안 머물다가 돌아왔다고 말했다. 논문준비로 시간에 쫓기지만 않았다면 며칠 더 묵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게 아쉽다는 말도 했다.
“아름다운 호수도 있고 중부 러시아의 멋진 전원 풍경을 볼 수 있어요. 그런 곳에 가 볼 수 있다는 건 행운이죠. 러시아에서 몇 해씩 생활해도 그런 곳에 가 볼 기회가 좀처럼 없거든요.”
내게 K를 연결해 준 서울의 L 교수도 랴잔 주의 다차에 관해 문 군과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그런 얘기를 듣고 콘스탄찌노보에 대한 내 기대감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모스크바에 와서 K를 기다리는 동안, 기대감은 조금씩 식어 갔다. K가 약속된 날짜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콘스탄찌노보는 실재하는 땅이 아닌, 소재지도 확인되지 않은 추상적인 지명으로 차츰 변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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