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 되면 여름날 무성했던 나뭇잎은 하나둘씩 떨어져 땅 위에 수북이 쌓이고, 쌀쌀한 한기가 제법 추위를 느끼게 합니다.
이런 늦가을, 한 때는 배움을 찾아 나선 사람들로 북적거렸으나 세월이 흐른 지금 찾는 사람의 발길조차 드문 서원을 찾는 일은 가을의 쓸쓸함을 다시 한번 되새김질시키게 만듭니다. 하지만 늦가을에 느끼는 이런 쓸쓸함은 여름날의 뜨거운 열정 못지않은 묘한 매력 같은 것을 지녔습니다.
회연서원(檜淵書院)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인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가 선조 16년(1583년)에 회연초당을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배출하였던 곳입니다.
그의 사후인 인조 5년(1627년) 지방 유림들의 공의에 따라 회연초당 자리에 회연서원을 건립하였으며, 숙종 16년(1690년)에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종 5년(1868년) 대원군의 사원철폐 때 철폐되었습니다. 지금의 건물들은 대부분 1974년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보수 복원되거나 신축된 것들입니다.
서원건축은 교육공간과 선현 추모의 공간이 일직선상에 놓이는 전학후묘 또는 전묘후학의 구조를 갖습니다.
그러나 회연서원은 비교적 좌우가 길고 평평하며 너른 지형 탓인지 그것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새로 지은 누각인 견도루에 올라가서 보면 오른쪽에 강당과 유생들이 기거하는 동재와 서재가 자리 잡고 있고, 두 구역을 가르는 담을 사이에 두고 왼쪽에 사당이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회연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의 건물로, 이마에 '회연서원'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오랜 풍상을 곱게 견딘 기품 있는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강당 안 벽에는 미수 허목의 빼어난 글씨로 쓴 '망운암'(望雲巖)과 '옥설헌'(玉雪軒)이라 적힌 편액이 좌우에 걸려 있습니다.
왼쪽 측실 옆 퇴보 위에도 허목이 쓴 '불괴침'(不槐寢)이라 적힌 편액이 또 하나 걸려 있습니다. 부끄러움 없는 잠자리. 부끄러움 없는 하루를 보내고 드는 잠자리는 아마 깃털처럼 가벼웠을 것이며, 당시 선비가 바라는 하루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허목의 글씨가 이곳에 많은 것은 거창 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와 한강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구의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시호는 문목(文穆)입니다. 본관은 청주, 출신은 성주입니다. 아버지 정사중이 성주 이씨와 혼인하여 성주에 정착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현풍 낙동강 가에 서 있는 도동서원의 주인인 한훤당 김굉필은 그의 외증조(外曾祖)가 됩니다. 21세가 되던 1563년에는 퇴계를 찾아 도산 문하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이어 24세 때인 1566년에는 남명에게 나아가 덕천 문하에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김굉필의 도학을 전수하고 그 기반 위에 퇴계학과 남명학을 통합하여 새로운 학통을 세워 실학의 연원을 확립하는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정구는 회연초당 뜰에 매화나무를 가득 심고 백매원(百梅園)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 그가
자그마한 집 하나
뜰 가득 매화 국화 해마다 늘고
물과 구름 있으니 그림이어라
뉘 있어 나만큼 사치로울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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