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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 연재소설] 너는 언제 외로우냐? - 4회

ㄹl브ㄱL 2011. 6. 30. 10:46

너는 언제 외로우냐? - 4회

 

송 영

 

 

K에 관해 나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오래 전 그의 몇 작품들이 국내에서 출간되어 그의 이름과 함께 알려졌으나 나는 하나도 읽지 못했다. 아마 고려인 출신 작가라는 꼬리표에 큰 관심을 갖지 못했던 것 같다.

 

 모스크바007.jpg

 

러시아문학 전공인 L 교수 말에 의하면 그의 작품은 전위성이 강한데 러시아 말로는 아름답고 정교한 문체이나 우리말로 서툴게 옮겨 놓으면 내용이 모호해지는 경향이 있어서 당시 출간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K의 작품을 읽었다거나 그의 작품에 관해 말하는 사람을 나는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K의 이름이 알려지고 한두 해가 지났을 무렵에 나는 어느 잡지에 실린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그것도 고작 한두 페이지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거기서 묘사된 어떤 한 장면은 내 흥미를 끌었고 지금까지 나는 그 짧은 장면만 기억하고 있다.

 

K는 군에서 막 제대한 뒤 건설 현장에서 크레인 기중기 운전기사로 일했다. 몸을 부리는 노동이 처음은 아니고 입대 전에도 그는 건설 현장에서 갖가지 막일을 했었다.

 

‘기중기 운전기사는 노동판에서 내가 얻은 가장 근사한 직종이었다.’

 

그는 자전에서 이렇게 썼다.

 

저녁 무렵에 기중기의 높은 운전석에 앉아 있으면 도심지 아파트의 내부가 환히 들여다보인다. 살을 드러내고 옷을 갈아입는 여인도 보이고 주방에서 맛있는 저녁 식탁을 마련하느라고 분주한 주부도 보이고 한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며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어느 중산층 가정의 풍경도 볼 수 있다. 혹은 대상이 상류사회 가정일 수도 있다.

 

가진 거라곤 젊음밖에 없는, 건설 공사 판을 전전하는 고려인 청년이 도심의 높은 허공에 떠 있는 기중기 운전석에 앉아 그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K는 거기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는 싱겁게도 젊음의 충동에 이끌려 벗은 여인의 몸을 훔쳐본 행동에 관해 훗날 도덕적 자괴감을 느꼈다는 고백을 끝으로 그 얘기를 끝냈다.

 

K는 공백으로 남겨 뒀지만 나는 이 장면에서 그가 당시 느꼈을 복잡한 심사와 갈등을 유추해봤다.

 

공사판 인부로 전전하는 고려인 청년이 모스크바의 상류사회로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회주의 사회에도 출신 인종에 대한 차별은 존재한다. 그것은 단순히 돈을 좀 모았다거나 한 가지 특출한 재주를 지녔다고 해서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두려움 없이 몽상을 즐기는 이 고려인 청년은 그때 높이 떠 있는 기중기의 운전석에 앉아 미래에 자신이 그 상류사회 복판으로 진출해서 인정을 받고 활동하는 꿈을 꾸지 않았을까?

 

  러시아002.jpg  

 

오랜 세월이 지나 K는 당시 불가능해 보이던 그 꿈을 이루어냈다. 그는 상류사회 복판으로 진출했다. 사회주의가 한창이던 시기에 K는 이미 저명인사로 명성을 누렸고 상당한 재정적 기반도 닦았다.

 

이곳 교민들은 K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누구나 감탄과 존경의 말을 쏟아냈다. 그들은 K가 이루어낸 일들을 기적이라고 말했다. L 교수가 K는 러시아인보다 더 정교하고 아름다운 러시아 문체를 구사한다고 말했을 때 나도 그 ‘기적론’에 동의했다.

 

그러나 내가 흥미를 느낀 것은 현재의 K라기보다 까마득한 과거의 K의 모습이다. 늦은 저녁 무렵 공사장 기중기 운전석에 앉아 상류사회의 내밀한 풍경을 호시탐탐 엿보면서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다짐하는 소수민족 출신의 가난뱅이 몽상가, 내 뇌리에는 K는 여전히 이런 모습으로 남아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