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목사.철학 및 신학박사(하이델베르그대). 숭실대 철학과 교수(현대신학) 및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소장이며 「현대 신학의 전망」, 「하이데거에서 리꾀르까지」등의 저서가 있다.
현대신학자 가운데 그 생애는 짧았으나, 현대의 세속화 신학, 신죽음의 신학, 신학적 해석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신학자를 든다면 서슴지 않고 독일 고백교회의 영적 지도자요 신학자인 본훼퍼(Dietrich Bonheoffer)를 들 수 있다.
본훼퍼는그의 박사학위 논문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와 교수자격 논문
「행위와존재(Akt und Seim)」에서 철저히 교의학적이고 교회론적인 사고를 전개한다. 바르트의 영향을 받으나, 그는 그리스도 일변도의 계시신학으로 구조된 바르트의 신학을 기독론 일원론이라고 비판하면서, 오히려 그의 신학적 원천을 루터의 신학에서 찾고 있다.
그는 철저하게 교회중심적으로 사고했고, 계시신학적으로 사고했고, 이 테두리 안에서 교회 사회학적으로 사고했다.
그러나그의 후기사상에 있어서 그 중심은 교회에서부터 성숙한 세계 속의 기독교 신앙 해명으로 옮아간다.
그는여태까지 기독교회가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계몽주의의 역사적 현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종교의 신과 성서적인 신, 기계적인 신과 인격적인 신을 구분하면서, 성숙한 세계 속에서 기독자는“ 마치 신이 없는 것처럼(etei deus non daretur) ”살아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어귀와 더불어 그의 다른 어귀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Vor Gott ohne Gott)”는 보수적 교회와 신학자들에게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고, 그는 마치 사신신학의 선구자로 잘못 평가되기도 했다.
필자는현대상황에 비춰지는 본훼퍼 사상의 의미를 그의 후기 사상의 초점이라고 할 수 있는 “성숙한 세계속에서의 기독교 신앙”에 관해서 논구해 보고자 한다.
성숙한 세계의 긍정적 수납
성숙한 세계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는 후기 본훼퍼 사상을 지배하고 있다. 세계의 성숙성(die Mundigkeit der Welt)이란 계몽주의적 사고이다. 칸트(I. Kant)는 계몽주의(Aufklarung)를 “스스로 잘못된 미성숙으로부터 인류가 헤쳐나옴”(das Heraustrenten der Menschheit aus der selbstverschuldeten Unmunaig Keit)이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칸트적 사고에 입각해서 계몽주의란 인간이 그의 이성과 오성을 자립적으로 사용하는 자율성(Autonomie)을 말한다.
자율성이란인간이 이성의 능력으로 자연을 구성하고 역사를 기획하는 역사적 여명이다. 그것은 후기 중세 이후 역사적 발전의 결과이다. 본훼퍼는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을 긍정적으로 수납한다. 계몽주의는 인류 역사의 자율성을 향한 발전으로서, 세계가 학문, 사회적 삶, 국가적 삶과 예술과 윤리와 종교에 있어서 살 수 있는 법칙을 발견하고 스스로 완결되는 삶을 사는 과정을 성취하고 있다. 본훼퍼에 의하면 이러한 계몽주의의 자율성이념이란 현대에 와서 완결에 도달하고 있다.
이러한역사의 발전에 대해 교회는 부정적인 태도를 추했다. 교회는 자율성의 길을 타락 내지 불신앙의 길이라고 규정했다. 자율성에의 길은 종교적으로 부정적인 길을 초래했다. 인간이 자율성을 회복한만큼 신의 지배는 그만큼 축소되었다. 그것은 마치 커가는 아이들과 부모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었다. 학문적 진보는 신을 인간 삶의 변두리로 퇴각시켰다. 그래서 신은 인간 삶의 중심으로부터 인간지식과 능력의 틈으로 밀려 나갔다. 신은 이제 죽음, 영원, 죄, 부활 등 최후문제들이 귀속하는 한계상황의 해결사가 되어 버린다. 이러한 인간지식의 진보에 대해 교회는 절망적으로 싸웠다. 교회는 인간능력의 틈새에 대한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인식의 진보에 대해 인간은 아직도 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인간의 절망, 진퇴유곡 및 나약함을 입증하려고만 했다.
본훼퍼는이러한 전통교회의 신이란 인격적인 신이기보다는 “틈 채우는 자”에 불과하다고 비난한다. 본훼퍼는 세계의 성숙성을 긍정적으로 수납하면서 신을 틈 채우는 자로 파악한 교회의 신관을 비판한다. 성숙성의 길이란 역사적인 필연성이며 그것을 결코 제지할 수 없다. 중세기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는 교직주의(Klerikalismus), 형식의 타율성(Heteronomie)으로 퇴각하는 것에 불과하다. 기독교신앙은 이 역사적 발전을 결정적으로 긍정하고 성숙성을 역사적인 숙명으로 뿐 아니라 신이 원하시는 인간의 과제로 받아야 한다. 본훼퍼에 의하면 자율성의 세계란 결단코 신으로부터의 타락이나 비기독교적인 현상이 아니라 신이 인간 사회와 더불어 가시는 길이다.
작업가설의 신 아닌 인격적인 신에 대한 신앙
본훼퍼는이 성숙한 시대에 있어서 신을 알려지지 아니한 인과율 설명을 위한“ 틈 채우는 자”나 “작업가설(Arbeitshypothese)”이 아니라, 현대인간이 그의 능력과 강함에 있어서 대결해야 하는 신, 현대인간으로 하여금 이 성숙성을 가능케 하고 이러한 성숙성에 대한 책임을 부여한 인격적인 신으로 파악한다. “저항과 굴종(Widerstand und Ergebung)”이라고 제목 붙여진 그의 옥중서신에서 본훼퍼는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신은 여기서 틈을 채우는 자가 아니다 .우리 가능성의 한계에서가 아니라 삶의 한가운데서 신은 인식되어야 한다. 죽음에서가 아니라 삶 속에서, 고인속에서가 아니라 건강과 힘 속에서, 죄 속에서가 아니라 행위 속에서 비로소 신은 인식되어야만 한다.”2
본훼퍼는더이상 신을 인간의 한계상황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강함과 능력 속에서 죽음과 죄에서가 아니라 삶과 선에서 인식하고자 한다. 여기서 본훼퍼는 관례적인 기독교 변증학의 길을 떠나고 있으며, 현대적인 종교비판을 기독교 신앙의 측면에서 수용하면서 더 깊은 세속적 신 진출 변증학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신을 어떤 최후의 비밀처소로 몰래 끌어들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오로지 세계와 인간의 성숙성을 단순히 인정해야 하며 인간을 그의 세계성에 있어서 퇴락시키지 않고 그를 그의 가장 강한 처소에 있어서 신과 대결시켜야 한다.3” 살아계시는 성서적 인격신은 세계와 성숙한 인간을 요구하신다. 그는 결단코 자연과학의 인식가설로 수용되는 작업가설이나 미성숙한 인간의 어려움과 고난을 보호하시는 후견인(Vormund)이나 인간이 채울 수 없는 능력과 지식의 틈을 채우는 자가 아니다. 작업가설이나 후견인이나 틈 채우는 자는 결단코 살아계시는 신이 아니요 결단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는 본훼퍼의 이러한 진술과 사상 속에서 전체주의 국가와 전쟁의 고난의 현장 속에서 직면하고 있는 순교자의 한계상황에 처한 수감자의 사고 및 유대인과 집단수용소 복역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학대애호증(Sadismus)의 사고를 느낄 수 있다.4
본훼퍼는계몽주의자가 제시하는 세계의 성숙성을 밝은 면과 어두운 면, 두 가지로 명상한다. 계몽주의의 성숙성 요구란 자율이성을 주신 신을 예정된 조화 속에서 선하고 지혜롭게 이 세계를 섭리하시는 분으로 표상하는 것에 그친다. 이것은 계몽주의가 제시하는 성숙성의 밝은 측면이다. 계몽주의의 성숙성 이념은 인간과 세계로 하여금 한계상황 속에서 신 없이 완결되기를 요구한다. 하나님은 세계와 인간을 자기 성숙성으로 성장하게 하셨으므로 이제는 인간의 한계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더이상 간섭하지 않으신다. 이것은 계몽주의가 제시하는 성숙성의 어두운 측면이다.
성숙한 세계의 신
본훼퍼는이러한 성숙성의 이념으로 “틈 채우는 자”로서의 신을 거부한다. “틈 채우는 자”는 여기서 세계연관의 인식틈을 채우는 자일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성서가 말하는 실존적인 틈, 곧 인간 삶의 고난의 상황을 해결해주는 자로 확장되어 파악된다. 본훼퍼는 성서귀절을 인용한다.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이러한 성서적 신도 본훼퍼에 의해서 새롭게 질문되고 있다.
성숙한세계의 신은 인간의 고난 상황 속에서 관여하지 아니하시고, “마치 신이 없는 것처럼”(etis deus non daretur) 우리의 숙명이 수행되도록 우리를 버려두신다.
본훼퍼는성숙한 세계의 신과 종교의 신을 구분한다. 종교의 신은 우리의 한계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피난처와 도피처로서 다가오는 신이다. 그러나 성숙한 세계의 신은 우리를 고난과 죽음 가운데 내버려 두신다. 본훼퍼는 종교의 신을“ 틈을 채우는 자”요, “기계적인 신”(deus ex machina)이라고 부른다.5 이러한 본훼퍼의 사상은 결단코 무신론을 말하고 있지 않다. 본훼퍼는 성숙한 세계의 신경험을 신학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이 경험의 성서적 예를 본훼퍼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최후로 절규한 예수의 부르짖음에서 찾는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나님은 그의 간섭하심 없이 우리 삶 극한상황 속에서 우리의 숙명이 가장 쓰디쓰게 수행되도록 내버려 두신다. 이것이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 토해낸 부르짖음의 신학적인 의미이다.
이러한본훼퍼의 사상은 도로테 죌레(Dorothee Solle)가 말하는 것처럼 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고난으로 인도하시고, 우리의 숙명이 다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신에 대한 성숙한 신자의 경험이다. 이 경험을 본훼퍼는 신 없이가 아니라 신 앞에서 수행하고 있다. 이것은 지성적인 솔직성에서 나온 성숙한 신자의 고백이다.
히틀러저격이 실패한 날, 본훼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마치 신없는 것처럼 이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함으로 비로소 솔직해 질 수 있다. 바로 이것을 우리는-신 앞에서-인식한다! 신 자신이 우리를 이 인식으로 강요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성숙함이 신 앞에서 우리 처지를 바로 인식케 한다. 우리가 하나님없이 우리의 삶을 완결하며 살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교훈하신다. 작업가설인 신 없이 이 세상에서 우리를 살도록 하는 신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그 앞에 서야 하는 신이다. 신 앞에서 신과 함께 우리는 신없이 산다.”6
여기서본훼퍼는 하나님없는 세계의 경험을 말하고 있으며, 결단코 무신론을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본훼퍼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Glaube an Gott)과 신 없는 세계 경험(Erfahrung der Welt ohne Gott)을 역설적으로 그의 성숙한 세계의 신신앙 속에서 통일하고자 한다.7
종교적인신신앙은 신없는 세계경험을 결단코 견지할 수 없다. 오로지 고난의 상황속에서 우리 인간을 도우는 신만이 참신이요, 이 신의 간섭은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신신앙에서는 만일 신이 인간의 고난 상황 속에서 그의 기도를 외면하고 임재하지 아니할 때, 이 신앙은 쉽사리 무신론으로 변모된다. 종교적인 신신앙과 무신론 사상과는 쉽사리 제휴할 수 있다. 본훼퍼는 그를 고난의 상황과 처형에 내버려 두시는 신 앞에서 더 이상 재래적인 종교의 신신앙으로 그의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다.
하나님에대한 인격적인 신앙이야말로 신으로부터 구원과 요행과 도움을 바라는 조건적인 신앙, 곧 기복 신앙이 아니라, 마치 신의 도움이 없다고 하더라도, 신의 부재속에서 우리의 숙명과 고난이 다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신의 뜻을 인식하고 신앙하는 성숙한 신앙이다. 이러한 성숙한 신앙만이 비로소 성숙한 세계가 경험하고 있는 신 부재의 경험을 무신론적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깊은 경건성, 곧 세속적인 경건성 안에서 지탱할 수 있다.
종교없는 시대 속에서의 신신앙
본훼퍼는참으로 처형의 순간까지 그를 죽음에 내버려 두시는 신과의 강한 내면적 연결 속에서 살았다. 그를 죽음에 내버려 두시는 신은 그와 함께 하시고, 그가 항상 그 앞에서 선 살아계신 신이다. “마치 신이 없는 것처럼”은 외면적으로는 신을 부인하거나 신에 대한 책임이 없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나, 내면적으로 오히려 신과의 연합과 신 앞의 책임의식에 연결되어 있다. 세계의 신 부재는 종교부재(Religionslosigkeit)를 초래할 수 있으나, 신앙부재(Glaubenslosigkeit)를 초래하지는 않는다. 본훼퍼의 성숙한 세계의 신이해는 그의 해석학적 착상인 성서적 개념의 비종교적 해석과 연관되어 해석되어야 한다.8
우리는본훼퍼가 성숙한 세계개념과 계몽주의를 긍정적으로 수용했다고 해서 그를 자유주의자 내지 문화기독교주의자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본훼퍼 자신은 현대세계가 경험하는 문화적 현상과 종교 현상을 진지하게 기독자로서 받아들였고, 따라서 신 부재 경험 속에 있는 현대인들에게 신을 새롭게 증언하는 해석학적 착상에 동기되어졌음을 알아야 한다. 그의 옥중서신에서 본훼퍼는 다음과 같이 역사적 기독교의 존재의미를 해석학적 관점에서 제기하고 있다.
“현대인들에게용어로써-신학적 용어든, 경건한 용어든 간에-말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내면성과 양심의 시대, 즉 종교일반의 시대는 지나갔다. 우리는 전혀 종교 없는 시대에 직면하고 있다.”
“어떻게그리스도께서 종교 없는 자의 주님도 될 수 있는가?10”
“어떻게신에 대해 세상적으로 말하는가?”“ 그러면 그리스도는 더 이상 종교의 대상이 아니라 아주 다른 자, 세상의 주님이시다.”11
“회개,신앙, 의인, 중생, 성화의 개념들이 어떻게 `세상적으로`-구약과 요한복음 1:14의 의미에 있어서-변형해서 해석될 수 있는가에 대해 나는 순간적으로 음미하고 있다.”12
성숙한세계는 더 이상 형이상학이나 내세, 종교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선천성이 더이상 적용되지 않는 세계이다.
이러한종교가 지나가버린 시대 속에서 본훼퍼는 종교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이 성숙한 세계를 인류에게 선사하신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앙을 말한다. 그리고 이 신앙은 성서적 신이 더이상 재래적이고 종교적인 신, 곧 기복적인 신앙대상이 아니라 현대인의 삶의 한복판 속에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이 현대인의 성숙한 삶의 한가운데 임재해 계시는 신에 대해서 종교적인 언어가 아닌 세속적인 언어로써 증언하고자 한다.
예수의 십자가 속에 현재 하시는 하나님
본훼퍼가언급하는 성숙한 세계 속의 신 부재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사건과 연관해서 비로소 그 진정한 신학적 깊이를 드러낸다. 성숙한 세계 속에서 신 부재의 경험과 마치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본훼퍼의 사상은 단순히 성숙한 세계속에서 재래적인 틈 채우는 자로서의 신의 제거, 생의 강한 처소에서의 신과의 대결이라는 사고의 결론이라기보다는 본훼퍼가 성숙한 세계 속에서 전개하고 있는 고난 신학(Karfreitagstheologie) 사상의 지평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미언급했거니와 본훼퍼는 결단코 무신론을 말하고 있지 않고 사신론을 말하고 있지 않다. 후기 본훼퍼 사상에서 신은 결단코 존재치 않다거나 신은 죽었다고 주장되지 않는다. 후기 본훼퍼 사상을 일부 보수신학자들이 사신신학의 선구라고 해석하는 것은13 왜곡이다. 본훼퍼는 성숙한 세계 속에서 부재하는 신의 경험을 십자가 신학으로 천명하면서, 현대세계 속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세계로부터 퇴각한 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계 속에 현재하고 계신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하시는 신은 강한 자로서, 승리자로서가 아니라, 무능한 자(Ohnmachtige)로서 고난받는 자(der Leidende)로서 계신다. “신은 이 세상에서 십자가로 퇴각하신다. 신은 이 세상에서 무력하시고 약하시다. 그렇게 하셔서 신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도우신다.”14
본훼퍼는십자가의 고난과 신비에 대한 명상 속에서 성숙한 세계의 신 부재 경험의 성서적 처소를 직관한다. 그리스도의 최후의 절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는 결단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의 주장도, 신의 죽음을 선언하는 니이체나 현대 사신론자의 선언도 아니라, 오히려 인류의 구속을 위해서 아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 내버려두시는 자비스럽고 그러나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아들을 되살리기를 바라거나 기적을 행했던 예수를 다시 구출하기를 바랐던 자들, 그리고 신을 부정하거나 부재를 믿는 자들, 당시 종교지도자들, 로마 권력자들에게는 외견상으로 간섭치 않고 역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로 하나님은 고난받는 그의 아들 예수의 십자가 속에서 현존하고 계실 뿐 아니라 고난의 방관자로 계시기 보다는 오히려 같이 고난받으시는 구세주로서 계신다. 하나님 자신이 그의 아들을 통해서 이 신 부재의 세계속에서 고난받으신다. 하나님은 이 성숙한 세계 속에서 능동적으로 간여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의 사건 속에서 이 성숙한 세계의 고난이 끝날 때까지, 같이 고난 받으신다.
본훼퍼는여기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의 연합 속에서 그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난을 극복하는 신앙의 원천을 발견하고 있다. 세계의 참여, 곧 세계가 당하고 있는 고난에 대한 주체적인 참여야말로 신으로부터의 떠남이나 신의 존재 부정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과의 연합(Gottesgemeinschaft)을 심화시킨다.
종교의 신앙과 세속적 신앙
십자가신학의 착상에서 볼 때 고난 속에 있는 자기의 숙명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나기까지 내버려두시는 하나님에 대해 최후까지 신뢰를 견지한 예수의 신앙이야말로 성숙한 세계 속에서 우리의 숙명과 고난 속에 관여하시지 않고 우리의 최후가 끝나도록 내버려두시는 하나님에 대한 견고한 신앙이다. 이 신앙이야말로 예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증언해주는 참된 신앙이다. 우리의 고난을 생각하고 신으로부터 도움을 기대하여 그것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요. 틈을 채우고자 하는 신앙이며, 기계적인 신에 대한 신앙이요, 종교의 신앙이다.
`옥중서신`에서본훼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년 동안 나는 점차 기독교의 깊은 세속성을 배우고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이 아니라, 인간 그자체가 기독자이다. 예수가 세례요한과 달리 인간이었던 것 같이 나는 여기서 계몽된 자, 활동적인 자, 안일한 자 또는 탐부자의 속되고 진부한 차안성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를 규제하고 죽음과 부활의 인식이 항상 현대적인 깊은 차안성을 의미한다.”15
본훼퍼는여기서 무신론이나 사신론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은 세속적 신앙을 말하고 있다. 이 세속적 신앙은 종교적 신앙도 아니며 천박하고 탐욕에 젖어 있는 차안성 사고가 아니라 죽음과 부활을 강력히 의식하는 깊은 차안성에의 각성을 말한다. 이에 대해 종교적인 신앙이란 세속적 현실이 요구하는 진지한 고난과 어려움에서 신으로 도피해서 우리 현실이 제기하는 문제에서 회피하고 신을 인격적으로 인간이 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분이기 보다는 기복의 원천으로만 표상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이란 신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겟세마네에서 깨어있는 세속적인 신앙이다. 이것이야말로 성숙한 세계 속에서의 참된 하나님 신앙이다. 그러므로 본훼퍼는 `옥중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에모든 종교와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인간의 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고난 속에서 세계 속에 신의 능력을 의지하게 한다. 신은 여기서 기계의 신(daus ex machina)이다. 성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신의 무능과 신의 고난을 향하도록 한다. 고난받는 신만이 도울 수 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허위의 신 표상이 제거되는 성숙한 세계로의 발전은 세계 속에서 그의 무능을 통해서 능력과 공간을 얻는 성서의 신을 보게한다. 여기에 `세속적 해석`이 착안되어야 할 것이다.”16
종교적신앙은 고난을 회피하고 신의 전능과 강함을 추구하며 신의 능력에 의지하며 모든 실존적인 어려움과 한계상황을 극복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 진정한 성서적 신앙은 고난 속에서 현재하는 신을 직관하면서 신의 고난에 같이 참여하고 그 고난에서 도피하지 않고 고난 속에 임재하시는 신의 무능과 사랑을 추구하며 신께 감사하며 찬송한다.
세속적 신앙 사상의 현대적 의미
후기본훼퍼의 세속적 신앙 사상은 하나의 완결된 원고나 책으로 전해진 것이 아니고, 옥중에서 틈틈이 쓴 것을 그의 친구요 제자인 베트게(Eherhard Bethge)가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대면하는 것은 단편적인 서한들에 불과하다. 이러한 단편적인 서한들은 일관성있게 체계적으로 신앙의 세속적 차원을 깊이 조명하기 않고, 긴장 내지 모순을 일으키는 표현들도 많다. 그의 후기사상은 그의 전기 교의학적 교회적 사고와의 연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의 후기사상은 이러한 초기의 교의학적이고 교회 중심적인 사고에서 이탈하기보다는, 이 사고로부터 성숙한 세계속의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천명하는 해석학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후기의 세속적 신앙 사상은 기독교 신앙이 오늘날 세속 도시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야하며, 성숙한 현대인의 신앙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해서 하나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란 기복신앙이 아니라 고난받는 이 세상의 어려움과 문제와 대결하는 연단받는 신앙, 세계의 고난에 참여하는 신앙이요, 세계의 고난 속에서 고난 받으시는 신의 고난에 참여하는 신앙이다. 이 신앙이야말로 현실의 고난과 문제로부터 도피하는 신앙이 아니라, 철저히 세속적 현실의 문제와 일상사와 대결하는 신앙이요, 그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이다.
이처럼본훼퍼는 구체적으로는 히틀러의 나치 정권하에서 고난받는 유대인과 유린당하는 독일교회와 민족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영상에 기초하여, 그 문제에 뛰어들었고, 하나님 앞에서 그의 숙명이 다하도록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성숙한 신앙인으로 처형대에서 순교적인 죽음을 달게 받았다. 오늘날 개혁신학사상을 고수하고 있는 한국교회를 향해서 본훼퍼의 사상은 크나큰 도전을 주고 있다. 한국보수교회는 이 민족과 국가가 지고 있는 남북의 분단문제, 정치의 민주화 문제, 노사관계의 문제, 경제적인 빈부계층의 지나친 간격화에 대해 예언적 말씀을 외치기를 꺼리고 있다. 교회는 결단코 정당이나 하나의 사회단체의 역할을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한 사회의 문제가 그것이 단순히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라는 국부성의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국가의 기본질서를 깨뜨리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을 때 예언적 경고를 들려주어야만 한다.
기독자개인도 난 혼자만 구원 얻는다는 이기적 신앙,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출세하겠다는 기복신앙의 차원을 떠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날마다 따르는 삶을 살아야겠다.
이것이곧 본훼퍼가 후대인들에게 들려주는 진정한 신앙의 교훈이요, 그의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한 신앙이 왜곡되지 않고 우리들에게 바르게 들려질 수 있는 본훼퍼 해석이다.
주(註)----------------------------
1.Bonhoeffer, Widerstand und Ergebung, 1966, pp. 210f.
2.상게서 1952. p. 211
3.상게서 1952. p. 136
4.U. Neuenschwander, Denker des Glaubens, Gutersloh, 1974, p. 141
5.D, Bonhoeffer, 상게서 1952. p. 242
6.상게서 1952. p. 241
7.金英漢, 본훼퍼의 非宗敎的 基督敎 解釋學, 하이데거에서 리꾀르까지 1987, 博
英社,p. 139
8.상게서 pp. 140-142
9.D. Bonhoeffer, 상게서 81974. p. 178
10.상게서 81974 p. 179
11.상게서 81974 p. 180
12.상게서 81974 p. 185
13.金義煥, 도전받는보수신학, 성광문화사 1970 pp. 25-31
14.D. Bonhoeffer, Widerstand und Ergebung 1966. p. 242
15.상게서 1966 p. 248
16.상게서 1970 p. 394
자료출처:목회와 신학
출처 : 등불 든 이의 삶!
글쓴이 : 순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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