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60년대 한글 사용의 인식 변화가 '타자기' 역사 바꿨다" | ||||||||||||||||||||||||||||||
과학과 사회_ 한글과 근대 기술의 충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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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기본적으로 사적인 행위다. 그렇다면 한 사회의 글쓰기 문화가 바뀌는 일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개인들의 작은 변화가 오랜 세월 누적돼 집단의 변화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국가의 정책이 바뀌거나 인위적으로 형성된 집단이 특정 문화를 일거에 받아들임으로써 사회의 다른 부문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1940년대 말까지 한글 타자기는 수십 대의 수입 물량도 팔지 못할 정도로 시장을 찾지 못해 고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약 20년이 지난 1968년, 남한의 정부 각 부처에서 이용 중인 한글 타자기를 합치면 1만1천163대에 이르렀고, 여러 제조사들의 주장에 따르면 누계 6만2천여 대에 이르는 타자기가 팔려 나갔다. 20년 전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던 시장이 이렇게 팽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1950-60년대 타자기 시장의 팽창의 요인을 조직화된 집단적 수요가 출현했다는 데서 찾고자 한다. 이 무렵 앞 세대의 타자기보다 한 발 나아간 타자기들이 시장에 선보였을 뿐 아니라, 가로쓰기와 한글 전용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서서히 늘어났으며, 무엇보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비대해진 군이 집단적으로 한글 타자기를 수용해 시장을 창출했다. 이들 요인들을 고루 고려하지 않고는 시장의 급격한 팽창을 설명하기 어렵다. 공병우와 세벌식 '속도' 타자기
공병우 타자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이전의 타자기와 구별되는 혁신적인 제품이었다. 첫째, 가로 모아쓰기를 실용적으로 구현한 최초의 타자기였다. 둘째, 글쇠 벌수를 줄여 빠르고 직관적인 타자가 가능한 타자기였다. 1966년의 통계에 따르면 숙련된 공병우식 타자수는 로마자 타자기보다도 타수 기준으로 30퍼센트 빨랐다. 셋째, 글자의 조형성을 포기하고 속도와 타자 능률만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도 다른 타자기와는 명확히 구별되는 타자기였다. 공병우는 타자기에 대해 완고할 정도로 명확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타자기를 소개하면서 “나는 글자 체재에 대한 과학적 실용적 가치를 무시하고 종래의 근거 없는 다만 습관상의 미적 요구에 응하기 위하여 비과학적 자체를 찍는 비능률적인 타자기를 고안하고 싶지는 않다”라고 천명함으로써, 고르지 않은 자형에 대해 소극적으로 변명하지 않고 공격적으로 그 가치를 주장했다. 타자기는 빠른 속도로 글씨를 찍어내어 문서를 유통시키면 자신의 임무를 마친 것이며, 가지런한 글씨를 원한다면 나중에 인쇄기나 조판기를 이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공병우 타자기와 군(軍) 그러나 공병우 타자기에 대한 시장의 첫 반응은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타자기는 인쇄기가 아니라는 공병우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한글 전용 가로쓰기 타자기, 게다가 아랫줄이 들쭉날쭉한 글자를 찍는 타자기가 과연 쓸모가 있겠느냐는 식의 반응이 많았다. 남한 문교부가 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주한미국경제원조처(ECA: 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를 찾아가 자신의 타자기를 원조 물품으로 공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경제원호처에서 타자기의 주문까지 끝낸 시점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이 또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공병우에게도 한국전쟁은 시련이자 기회였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직후 공병우는 정치보위부원에게 연행됐다. 1946년의 '精版社 위조지폐 사건' 공판 과정에서 고문 수사와 증거 조작 논란이 있었는데, 공병우는 백인제와 함께 용의자들을 진찰한 뒤 고문 주장에 반대되는 소견을 냈다. 정판사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이 큰 타격을 입고 결국 남한에서 불법화됐으므로 북한측은 서울을 점령한 뒤 공병우를 정치범으로 체포한 것이다. 그런데 두 달 가까이 수감돼 있던 공병우는 한글 타자기를 개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예기치 않았던 기회를 잡게 됐다. 타자기에 관심을 보인 인민군 장교가 공병우를 서대문형무소에서 빼내어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타자기를 설계하도록 해 준 것이다. 공병우는 타자기 설계도를 그리는 척하며 시간을 끌다가 인민군이 서울에서 퇴각할 때 혼란을 틈타 달아났다. 가족과 다시 만난 공병우는 1.4 후퇴를 맞아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거기에서 해군본부 인사국장 김일병 대령이 해군참모총장 孫元一(1909-1980)의 지시로 자신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손원일이 타자기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명확히 밝혀져 있지는 않다. 몇 가지 실마리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가 평안남도 강서 출생으로 송기주(1900년 강서 출생)와 동향의 동년배라는 점, 젊은 시절을 중국 상하이와 영국 등 외국의 대도시에서 보내면서 서구식 글쓰기 문화에 많이 노출됐다는 점, 남한 해군을 창설하고 미군과 같이 작전을 수행하면서 군 조직의 효과적인 문서 생산과 유통 방식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는 점 등이다.
해군참모총장이자 해병대 창설자가 후원자가 되면서 공병우 타자기는 빠른 속도로 군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해군본부 인사국은 한국군 최초로 공문서를 타자기로 작성한 부서가 되었다. 공병우는 육·해·공군에서 뽑혀 온 15명의 군인을 가르쳤고, 이들은 경상북도 영천의 3군 합동 타자 훈련 학교의 교관이 돼 각 군에 공병우 타자기를 가르쳤다. 공병우는 군이 공병우 타자기의 최대 수요처가 된 것을 “군은 형식보다는 능률과 속도를 중시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미군과 인민군이 남한의 공무원보다도 자신의 타자기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 경험을 근거로 들고 있다. 일리 있는 이야기이기는 하나, 손원일이나 김동조, 나아가 이승만과 같은 거물의 후원이 없었더라도 공병우 타자기가 이처럼 급격히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군인이라고 모두 가로 쓰는 순한글 문서를 선호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백선엽은 1957년 육군 참모총장이 된 뒤 한글 타자기로 찍은 공문이 읽기 불편하다며 한자를 섞어 손으로 문서를 써 올리도록 지시했는데, 이승만이 한글날 담화에서 한글 전용 방침을 재천명하며 지시를 철회한 일도 있다. 이승만은 한글전용론에 기울어 있었고, 중요한 외교 서한을 타자기로 작성하고 타자하는 자신의 모습을 언론에 내보낼 정도로 타자기의 가치를 높이 사고 있었으므로 한글 타자기 발명가들에게 적잖이 힘이 됐다. 이런 사례들을 생각해 보면 고위층의 개인이 한글 타자기를 받아들이느냐의 여부는 군이냐 민간이냐보다도 오히려 그가 얼마나 서구 문물을 많이 접한 인물이냐에 따라 좌우됐다고 할 수 있다. 해방과 전쟁이라는 혼란 속에서도 공병우는 서구화된 엘리트의 지지를 바탕으로 당대 가장 잘 조직되고 자원이 풍부한 집단이었던 군과 정부를 고객으로 확보한 것이다. 시장의 성장과 분화: 예고된 표준화 논쟁 이승만이 한글전용의 소신을 견지했고 강경한 한글전용론자였던 최현배가 문교부 편수국장으로 두 차례(1946-1948, 1951-1954) 재직하는 사이 한글전용이 공식적으로는 문교 정책의 무시할 수 없는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서구식 출판물이 점점 많이 국내로 들어오면서 세로쓰기 일변도였던 문서 생활에도 차츰 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점차 가로쓰기 한글전용 타자기도 쓸 만한 물건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1961년의 5.16 군사정변은 타자기 시장을 더욱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 군대식 문화가 사회 각 분야를 지배하면서, 군에서 먼저 자리 잡은 한글전용 타자기 문서가 다른 분야로 퍼져 나갔다. 군사정권은 전 정권의 한글 전용 기조를 계승하고, 그 명분의 하나로 타자기를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불어난 시장을 공병우 타자기가 모조리 독점할 수는 없었다. 공무원 사회와 민간 기업에서는 공병우 타자기의 위치가 군에서만큼 확고하지 못했다. 공병우 타자기가 만들어내는 들쭉날쭉한 글자꼴은 네모반듯한 글씨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어색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가로쓰기와 한글전용에 대해서도 공무원 사회와 민간 기업은 대체로 군보다 보수적인 입장이었다. 더욱이 일부 공무원들은 세벌식으로 쓴 글씨는 나중에 받침을 임의로 첨삭하여 변조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공병우 타자기가 공문서 작성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공병우 타자기보다 속도는 좀 느리더라도 더 가지런한 모양의 글씨를 찍을 수 있는 이른바 '體裁 타자기' 시장이 형성됐다. 김동훈(다섯벌식), 장봉선(다섯벌식), 백성죽(네벌식), 진윤권(네벌식) 등이 자신만의 제품을 들고 확대된 한글 타자기 시장에 뛰어들었다. 중앙공업연구소의 공학자 宋啓範은 전자 회로를 이용하여 자모를 입력 순서대로 모아 써 주는 인쇄전신기(텔레타이프)를 개발하여 관심을 끌기도 했다. 특히 김동훈은 앞서 말한 1949년 조선발명장려회의 타자기 현상 공모에서 3위 입상한 이래 다섯벌식 타자기를 연구해 상업화까지 성공했다. 김동훈 타자기는 체재 타자기 중에서 가장 널리 시장에 보급돼 공병우 타자기와 사실상 과점 체제를 형성했다. 공병우도 시장의 이런 흐름을 마냥 모른 체할 수는 없어서 세벌식 자판을 바탕으로 한 체재 타자기를 만들어 팔기도 하고, 김동훈에게 두 회사의 통합을 제의하기도 했다. 이렇게 시장이 분화된 것은 타자수 개인이 어떤 타자기를 선호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타자수를 고용하는 각 집단이나 기관이 한글 타자기에 기대하는 바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말해 “타자기는 무엇을 하는 기계인가”라는 규범적 질문으로 연결된다. 공병우 타자기를 선호하는 집단은 타자기는 무엇보다도 빠른 속도로 글을 찍어 주는 기계라고 인식했던 반면, 체재 타자기를 선호하는 집단은 타자기를 반듯하고 단정한 문서를 만들어 주는 기계라고 여겼다고 볼 수 있다. 한참 시장이 팽창하면서 “세벌식 타자기와 다섯벌식 타자기가 공존하면서 번영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는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시장이 성숙하고 본격적으로 표준화 논의가 진행된 1960년대 후반에는 각자 타자기의 본질에 대해 다른 관점을 견지했으므로 표준화 논쟁은 쉽게 해결될 수 없었다. 김태호 서울대병원 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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